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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十字軍)

윤 베드로 2014. 8. 21. 18:19

☆십자군(十字軍)

 

그리스도교를 수호하고 聖地를 탈환하기 위해

      서방교회의 원정군이 행한 中世최대의 군사원정으로,

      13세기 중엽부터 원정군들이 입은 옷에

      십자가가 그려 있다 하여 이렇게 불려지게 되었다.

 

1. 직접적 동기는 :

①1071년 셀주크 터키족이 지중해 동해안에 진출하여

             성지를 점거하고 순례자들을 박해한 사건

②터키군의 위협을 받은 비잔틴 황제가 교황에게

              세 차례나 군사적 도움을 요청한 데 있다.

   1095년 11월 클레르몽 교회회의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이 원정을 제창하였고,

③여기에 강화된 교황권, 성지에 대한 오랜 관심,

            동방과의 무역을 원하는 이탈리아 상인들의 야심 등의

               요인이 결합되어 원정이 시작되었다.

 

⇒대사(大赦)를 받고 전사할 경우 순교자의 칭호를 얻는다는 데서

         참가자들은 크게 고무되었으며

         또한 영토에 대한 기대와 유럽의 인구압력 등으로

         귀족과 농민들이 대규모로 참여하게 되었다.

 

2. 경과 : 실제적 원정 시기는 1096년부터 8차 원정(1270)이 끝내 실패하고

             최후의 라틴 領이었던 아크르가 함락당한 1291년까지이나,

               보통 동부 유럽으로 진출한 오스만 터키족과의 니코폴리스접전을 최후로 하여,

               원정을 속개시키는 데 실패한 비오(Pius) 2세가 서거한 1464년을

                           원정이 완전히 끝난 해로 본다.

 

3. 결과 : 이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봉건제도에 묶여 있던 유럽사회에 정치적․경제적․종교적으로

            새 바람을 불러 일으켜 근대로 넘어가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대부분 원정기간 중에 탄생하여 전통적인 은둔생황 대신에

           군사적 활동과 병자와 순례자에 대한 봉사를 병행했던

           기사 수도회는 서구의 수도생활에 새 요소를 첨가하였고

           비잔틴문화 및 이슬람문화와의 접촉으로 이들에 의해 보존․ 발전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눈을 돌리게 되어 스콜라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1차 원정의 승리로 절정에 올라 있던 교황권이

      계속되는 원정의 실패로 크게 실추되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그러나 성지탈환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지만

           이교도의 더 이상의 세력 확장은 저지되었다는 점

           또한 이 원정의 성과라 하겠다.

 

제 1 차 원정 (1096-1099년) :

동방세계를 구하고 성지를 탈환함을 목적으로 하였다.

안티오키아 함락(1098년), 예루살렘 탈환(1099년)에 성공.

지휘관 고드프리가 '성묘(聖墓)의 수호자'로 임명되고

향후 20년간 안티오키아, 트리폴리, 예루살렘, 에데사를 잇는 라틴령이 성립되었다.

 

제 2차 원정 (l147-l149년) :

이슬람 세력의 반격으로 에데사가 함락(1144년)되면서 시작.

예루살렘에 이르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제 3차 원정 (l184-1892년) :

붉은 수염의 프리드리히 황제, 영국왕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립 2세 등이

       참가하였으나 예루살렘 재탈환에는 실패하였다.

 

제 4차 원정 (I202-I204년) :

원래의 의도를 벗어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라틴제국을 세웠다(I204년).

이 탈선으로 동․서 교회의 분열이 조장되고

     이슬람세력에 대한 동방세계의 방위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제 5차 원정 (I217-I221년) :

시리아에 남아 있는 프랑크왕국 소유지를 방위하려고 노력,

2차의 대규모 이집트 원정이 모두 실패하였다.

성 프란치스코는 ‘술탄’ (Sultan)을 개종시키기 위해 중동으로 여행을 떠났다.

 

제 6차 원정 (1228-1229년) :

프리드리히 2세가 협상을 통해, 군사적으로 다시 한번 예루살렘을 회복하였다.

 

제 7차(1245-1254년) 및 8차(1270년) 원정이 모두 실패함으로써

        실제적 원정은 모두 끝났다.

서방에서는 차츰 십자군 원정에 반대하는 여론이 조성되고

       비폭력적인 설교를 통해 이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유럽 자체 내에서는 이교도 문제, 즉 스페인의 무어인, 이교 슬라브인,

       프랑스남부의 알비 市의 이단 등 더 현실적인 문제들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