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공부/네 복음서 이야기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

윤 베드로 2014. 4. 1. 11:57

16.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

 

23"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①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24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 왔다.

25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고 하였다.

26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곧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27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28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고 호통을 쳤다.

29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 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30그러나 그는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31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 바쳤다.

32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 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33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하며

                  34몹시 노하여 그 빛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35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언제, 어디서 : 29년 8월, 가파르나움>

 

*이 비유의 골자는 : 교우 형제의 죄를 용서해야 하는 까닭과

                           용서하지 않으면 엄벌을 면치 못한다고 경고하는 것.

 

⇒용서해야 하는 까닭은 :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무한한 용서를 받았기 때문(과거).

                   33절 말씀처럼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를 받은 사람은

                                         이웃의 작은 허물을 용서해야 마땅하다.

                  = 한 데나리온은 예수님 시대 노동자 하루 임금이다.

                     한 탈렌트는 육천 데나리온, 곧 육천 일의 勞賃.

                     일만 탈렌트 빚은 평생 무엇으로도 갚지 못할 빚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이런 빚을 지고 사는 사람이다.

                        ⤘1 데나리온 = 1일 노임,

                           1 탈렌트 = 6,000데나리온 ⟹ 6,000일 노임 ⟹ 약 17년 노임

                            일만 탈렌트 = 17만년 노임 ⟹ 어마어마한 숫자.

 

*이 비유에서는 :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비교에서 드러나듯이

                       θ의 한없는 자비와 용서 그리고 인간의 비정함이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줄거리 : 신하는 임금에게서 천문학적 빛을 탕감 받았지만,

                           자기에게 단지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는

                           말미조차 주지 않고 그를 감옥에 처넣는다.

                신하는 비정한 속성을 지닌 인간 표본이고,

                           받을 줄만 알고 베풀 줄을 모른다.

                이런 인간은 종말에 단죄 받는다고 한다(35절).

 

      ⇒사랑을 베풀 줄 몰랐으니,

         무슨 낯짝으로 사랑 자체이신 θ을 뵐 수 있느냐는 뜻.

 

*이 비유는 : Ɵ이 먼저 무한한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주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용서,

                          즉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Ɵ의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