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지리적 환경과 기후는 사람의 삶과 그 지역의 정치, 경제, 역사, 문화, 사상, 종교에 큰 영향을 미친다. 역사의 예수님을 이해하는데도 그분이 사셨던 환경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분이 태어나서 사셨던 땅,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셨던 땅, 돌아가셨으나 부활하신 그 땅으로의 여행을 떠나려 한다. 우리는 역사의 예수님이 사셨던 발자취를 따라 나서려고 한다.
팔레스티나
예수님이 사셨던 땅을 우리는 가나안,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거룩한 땅”, 이스라엘, 팔레스티나 등으로 부른다. 구약의 성조시대 때 이 땅을 가나안이라고 불렀는데,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이라서 “약속의 땅”(창세 12,7; 13,15 등)으로도 불렀다. 또 “젖과 꿀이 흐르는 땅”(탈출 3,8; 레위 20,24; 민수 14,8 등)이라는 표현도 구약성경에 나온다. 이 땅을 여호수아가 점령한 이후에는 “이스라엘 땅”으로 불렀고, “거룩한 땅”(즈카 2,16)으로도 불렀다. “팔레스티나”라는 명칭은 본래 지중해 연안에 살았던 필리스타인들이 살았던 지역을 가리키는 필리스티아에서 유래하였다. 이 용어는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기원전 5세기)가 사용하였으며, 로마 제국 시대인 기원후 134년에 제2차 유다 봉기를 진압한 하드리아누스 황제(117년~138년)가 사용하였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19년부터 1948년까지 영국의 위임통치하에서 팔레스티나라는 공식 명칭이 사용되었다.
예수님의 땅 팔레스티나를 가리키는 구약성경의 경계는 북쪽의 단에서 남쪽의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판관 20,1; 1사무 3,20 등)이다. 즉 북쪽 경계는 헤르몬 산에 이르고 남쪽 경계는 네겝에 이른다. 그리고 서쪽은 지중해에 닿고 동쪽은 요르단 강의 동부에 이른다. 팔레스티나는 남북의 길이는 242km에 이르고, 동서로는 북부의 경우 지중해에서 갈릴래아 호수까지가 45km, 남부는 지중해에서 사해(死海)까지가 87km에 걸쳐 있다.
지정학적 위치
팔레스티나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비옥한 초생달 지역”의 한 부분이다. 북쪽으로는 시리아를 거쳐 소아시아와 유럽으로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와 아시아로 연결된다. 남쪽으로는 이집트 등 아프리카로 이어진다. 이와 같이 팔레스티나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세 대륙을 연결하는 지정학적 요충지에 위치한다.
지형
팔레스티나는 지형적인 특징에 따라 지중해 해안 평야 지대, 중앙 산악 지대, 요르단 강 계곡 지대로 나눌 수 있다.
① 지중해 해안 평야 지대
지중해 해안을 따라 북쪽의 아코에서 남쪽의 가자 지역까지 약 270km에 걸쳐 평야 지대가 있다. 이것은 해안에서 안쪽 40km까지 펼쳐진 비옥한 평야지대이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페니키아 평야, 아코 평야, 도르 평야, 사론 평야, 필리스티아 평야가 있다.
해안 평야 지대는 해발 200m 이하의 지역으로 중요한 국제 도로인 바닷길(Via Maris)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교통로가 되었다.
이 지중해 해안 평야 지대에는 아코, 도르, 카이사리아, 야포, 아스돗, 아스클론, 가자 등의 도시가 형성되었다.
② 중앙 산악 지대
해안 평야 지대의 동쪽에는 중앙 산악 지대가 있다. 이 지역은 평균 해발 500~700m 정도로, 북쪽 레바논 산맥의 연장으로써 해발 600m 이상의 상부 갈릴래아 산악 지대, 600m 이하의 하부 갈릴래아 산악 지대, 사마리
아 산악 지대, 에프라임 산악 지대, 유다 산악 지대, 그리고 남쪽의 네겝 지역으로 연결된다. 이렇게 중앙 산악 지대는 팔레스티나의 등뼈 역할을 한다. 이 중앙 산악 지대에 위치한 도시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는 남북 왕국의 수도였으며 헤브론, 베들레헴, 베텔 등이 중요하다.
③ 요르단 강 계곡 지대
이 계곡 지대는 북쪽의 헤르몬 산에서부터 갈릴래아 호수, 요르단 강, 사해 지역까지 지층의 침강으로 형성된 단층 지역을 가리킨다. 이곳은 해수면보다 낮은 지역으로 사해 지역은 해저 400m에 이른다. 이 지역에는 오래 전부터 거주지가 형성되었는데, 발달된 도시로는 예리코, 벳 스안(스키토폴리스), 펠라 등이 있다.
기후
팔레스티나의 1년은 크게 우기와 건기로 나뉜다. 우기는 10월경에 시작해서 4월경까지 계속된다. 연중 강우량의 70%가 11~2월 중에 집중된다. 우기라고 해서 매일 비가 오는 것은 아니고 대략 우기 중의 절반 정도에만 비가 온다. 1월이 습도가 가장 높고 가장 춥다. 기후적인 면에서 팔레스티나는 일반적으로 지중해성 기후이다. 요르단 강 계곡 지대는 스텝 기후, 예리코 일대는 아열대성 기후이다. 그리고 네겝 지역은 사막 지대이다.
예수님은 기원후 1세기 전반부에 팔레스티나에 사셨던 유다인이셨다. 당시는 지리적으로 북쪽에는 갈릴래아 호수와 요르단 강을 동쪽 경계로 하는 갈릴래아 지방, 그 남쪽은 사마리아 지방, 그리고 그 남쪽은 유다 지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예루살렘은 이 유다의 수도이며 유다인들의 종교 생활의 중심지였다. 우리는 예수님이 사셨던 땅 팔레스티나에서 그분의 발자취를 찾으려 한다. 예수님의 땅에서 신약성경의 복음서를 다시 읽으려 한다. 우리는 복음서에 나타나는 베들레헴, 나자렛, 갈릴래아 호수, 카파르나움, 벳사이다, 카나, 카이사리아 필리피, 예리코, 벳파게, 베타니아, 예루살렘, 엠마오 등지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찾으려 한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나서는 이 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2년 1월호]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2) 베들레헴송창현(미카엘)|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임금인 다윗이 태어나고 자라난 곳이며, 무엇보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으로 유명하다. 베들레헴의 지명은 히브리어로 “빵(레헴)”의 “집(벧트)”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위치와 지형
구약성경의 베들레헴
구약성경에서 베들레헴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야곱의 사랑스런 아내인 라헬의 죽음과 관련 있다. 그녀는 베텔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던 중에 야곱의 열두 번째 아들인 벤야민을 낳고 죽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에프라타, 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 가에 묻혔다.(창세 35,16~20) 그리고 판관 19,1에서 베들레헴은 유다 땅으로 소개된다. 룻기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유다 베들레헴이다. 즉 나오미와 보아즈의 고향이 베들레헴이다. 나오미의 며느리인 모압 출신 룻은 보아즈와 결혼하여 오벳을 낳았는데,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1사무 16,1~13에 따르면, 베들레헴은 다윗이 태어나서 자란 곳일 뿐 아니라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곳이다. 그 후 베들레헴에는 필리스티아인들의 수비대가 있었고(2사무 23,14), 르하브암 임금은 그곳에 견고한 성읍을 세웠다.(2역대 11,6)
특히 베들레헴이 주목 받고 메시아 신앙의 중심지가 된 것은 미카 5,1의 예언 때문이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 것 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즉,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베들레헴
마태 2,1-12에 따르면, 헤로데 임금 때에 예수님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고, 동방 박사들이 그분을 경배하였다. 그 후 마태 2,16~18은 헤로데가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학살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루카, 2,1~20에 의하면, 요셉과 마리아는 호적 등록을 위해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갔다. 거기에 머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하였고 아기 예수님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그 고장에서 들에 살면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와 경배하였다.
요한 7,41~42에서는 군중 중의 사람들이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라고 말한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의 유다인들이 메시아와 관련하여 가지고 있던 생각을 잘 드러낸다.
중요 순례 장소
베들레헴의 여러 중요한 장소들 중에서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몇 곳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예수 성탄 성당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최초의 로마 제국 황제는 콘스탄티누스이다. 그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는 324년 베들레헴에 와서 예수님의 탄생지로 전해 오던 동굴에 순례하였다. 사실 기원후 2세기의 그리스도교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이 베들레헴의 동굴에서 태어나셨다고 한다. 이 전승은 나블루스 출신의 유스티누스 교부가 150년경에 쓴 “트리폰과의 대화”와 외경 중의 하나인 “야고보의 원 복음서”에 의해 전해진다. 헬레나 성녀는 이 동굴 위에 성당을 세우게 하였는데, 339년 5월 31일에 완성된 성당이 축성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성당으로 불렸던 이 첫 번째 성당은 불행히도 화재로 소실되었다. 오늘날의 예수 성탄 성당은 531년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세워졌다. 지금은 그리스 정교회의 소유인데, 현재의 성당에서 옛 콘스탄티누스 성당의 모자이크와 팔각형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② 겸손의 문
아르메니아 수도원을 오른쪽에 두고 구유의 광장이라 불리는 넓은 광장을 지나 예수 성탄 성당을 향해 걷다보면 성당의 출입문을 만난다. 이 출입문은 시대에 따라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오늘날에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의 성당 상인방을 확인 할 수 있는데, 그 아래에는 중세 시대의 아치 모양의 출입문 흔적이 있다. 그 아래에 있는 현재의 출입문은 높이가 1.2m, 너비는 80cm가 채 되지 않는 매우 작은 형태이다. 이것은 말이나 마차를 타고 성당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작게 만든 것으로서 누구든 예수 성탄 성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머리를 숙여야 한다. 그래서 이 출입문을 “겸손의 문”이라 부른다.
③ 예수 탄생 동굴의 은색 별
④ 성 가타리나 성당
예수 성탄 성당의 왼쪽에는 근대식으로 지어진 가타리나 성당이 있는데, 가톨릭 교회 소유로서 1881년에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이 성당에서는 매년 성탄 자정 미사가 예루살렘 총대주교의 주례로 거행되는데, 이 미사는 전 세계로 생중계된다. 여담으로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회는 성탄절을 12월 25일에 지내는데, 그리스 정교회는 1월 6일, 아르메니아 교회는 1월 18일에 성탄절을 지낸다.
⑤ 예로니무스 성인의 동굴
가타리나 성당의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면 근처의 예수 탄생 동굴과 비슷한 여러 동굴들이 있다. 그 중의 한 동굴에서 예로니무스 성인이 386년부터 34년간 머물면서 신·구약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이 불가타(Vulgata) 성경이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3) 나자렛div>
예수님은 “나자렛 출신”(마태 21,11; 요한 1,45; 사도 10,38) 혹은 “나자렛 사람”(마르 1,24; 10,47; 14,67; 16,6; 요한 18,5.7; 19,19; 사도 2,22)이라고 불리신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나자렛에서 보내셨고 공적인 활동을 거기에서 시작하셨다. 그래서 나자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지 중의 성지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예수, 베들레헴의 예수가 아니라 나자렛의 예수로 불리신다.
위치와 지형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134km, 갈릴래아 호숫가에 위치한 티베리아스에서 서남쪽으로 약 30km, 카나에서 서쪽으로 약 7km 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나자렛은 해발 약 375m에 위치한 산 위의 고을로(루카 4,29), 사방이 산들로 둘러싸인 지대가 높은 분지에 자리잡은 산골 마을이다.
구약성경의 나자렛
나자렛이라는 지명은 구약성경이나 고대 유다 문헌에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즉 예수님 이전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조그마한 촌락이 나자렛이었다. 사실 우리는 나자렛이라는 이름의 의미와 기원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히브리어로 “노츠리”라고 불린다. 그리스도교적 전승에 따르면, 이 용어는 이사 11,1인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에서 새싹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인 “네체르”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해석에 따르면 새싹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신약성경의 나자렛
루카 1,26-38에 따르면, 나자렛에 살고 있던 동정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이 예고된다.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루카 1,26-27) 요셉과 마리아는 원래 나자렛에서 살았는데, 아우구스투스의 칙령에 따라 호적을 등록하기 위해 다윗의 고을 베들레헴에 갔다가 거기서 아기 예수님을 낳았으며(마태 2,1-12; 루카 2,1-20), 이집트 피신 후(마태 2,13-15) 다시 나자렛으로 돌아가 그분을 키웠다.(마태 2,23; 루카 2,39-40.51-52) 마태 2,23에 따르면,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나자렛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루카 4,16-30), 고향 사람들로부터 불신과 배척을 받기도 하셨다.(마르 6,1-6)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루카 4,28-29) 요한 1,46에서는 사람들로부터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말해질 만큼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던 나자렛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원 후 1세기부터 유명해졌다.
중요 순례 장소
① 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
5세기 초에 마리아의 집터로 여겨지던 곳에 작은 성당이 세워졌다. 이것은 페르시아 군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후 이 터에 십자군 시대의 성당이 세워졌으나 이슬람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후로도 다시 세워진 성당들이 거듭 파괴되었는데, 1730년에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기념 성당을 세웠으나 이 또한 1955년에 파괴되었다.
오늘날 현존하는 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은 1960년부터 이전의 기념 성당 터 위에 다시 건설되어 1969년에 완공되었는데 2층의 구조로 된 큰 규모의 성당이다. 이 성당에서는 1954년부터 11년간에 걸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여러 동굴과 물 저장소, 곡식 저장소, 기름과 포도즙을 짜는 틀, 그리고 비잔틴 시대의 성당 터도 발견되었다. 성당의 바깥 전면에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주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장면과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의 네 복음사가가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성당 바깥에는 가브리엘 천사와 마리아의 동상도 있다.
② 주님 탄생 예고 동굴
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 아래층의 중앙에는 제대가 있는데, 여기에서 반 지하 형태의 계단을 내려가면 동정녀 마리아의 집터로 여겨지는 주님 탄생 예고 동굴이 있다. 이 동굴 안에 있는 제대에는 라틴어로 “VERBUM CARO HIC FACTUM EST”라고 쓰여 있는데 번역하면 “말씀이 이곳에서 사람이 되셨다.”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단어는 바로 “HIC”, 즉 “이곳에서”이다. 나자렛은 어떤 곳이었나? 예루살렘이 나라의 중심이었던 것에 비해, 갈릴래아는 변두리 땅이었다. 이러한 갈릴래아의 나자렛은 어둠과 침묵, 망각과 소외의 땅, 가난과 고단한 삶의 장소였다. 바로 그곳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던 것이다.
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 위층의 벽면과 성당 마당의 벽면에는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이 그린 다양한 성모자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는 한복을 입은 마리아가 색동옷을 입은 어린 예수님을 안고 있는 모자이크가 있는데, 바로 우리나라의 이남규 화가의 작품이다. 이와 같이 여러 나라, 여러 민족의 피부색을 가지고 그 전통의상을 입은 마리아와 예수님의 모습은 온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의 보편성과 풍요로움을 표현한다.
④ 성가정 성당
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에서 북쪽으로 약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성가정 성당 혹은 성 요셉 성당이 있다. 이 성당의 명칭은 성가정이 살았고 요셉의 작업장(마태 13,55)이 있었던 곳에서 유래한다. 십자군 시대에 세워진 성당 터 위에 비잔틴 시대의 기념 성당이 지어졌으나 파괴되었다. 오늘날 현존하는 성당은 1914년에 세워진 것이다.
⑤ 유다인 회당 기념 성당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2년 3월호]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4) 갈릴래아 호수
위치와 지형
갈릴래아 호수는 팔레스티나의 북쪽에 위치한 담수호(淡水湖)로, 오늘날에도 중요한 식수원이다. 헤르몬 산에서 발원한 요르단 강과 다른 지류들이 이 호수로 흘러들어 온 뒤 다시 요르단 강을 통해 남쪽의 사해(死海, Dead Sea)로 흐른다. 갈릴래아 호수의 남북 길이는 약 21km이고, 동서의 너비 중 가장 넓은 데가 약 12km로 전체 호수의 둘레는 52km 정도이다. 호수는 지중해 해수면보다 210m 아래에 위치하며 수심은 약 40m이다.
호수에는 약 22종류의 물고기가 서식하는데 그중에서 사도 베드로의 이름을 딴 베드로의 물고기(St. Peter’s Fish)가 유명하다. 예수님 시대처럼 오늘날에도 어업은 중요한 산업이다. 호수의 수면은 통상 잔잔하나 갑작스런 돌풍으로 엄청난 파도가 일어나기도 한다.(참조 마태 8,23-27; 14,24-33)
구약성경의 갈릴래아 호수
신약성경의 갈릴래아 호수
마르 1,16; 7,31과 마태 4,18; 15,29 등에서는 갈릴래아 호수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루카 5,1에서는 겐네사렛(Gennesaret) 호수라고 하는데, 이 이름은 호수 북서쪽에 있는 평야의 이름이 그리스어로 겐네사렛인 것에서 유래하였다. 요한 6,1에서 갈릴래아 호수는 티베리아스(Tiberias) 호수라고도 불리는데, 이 명칭은 기원후 18년에 세워져서 갈릴래아 지방의 수도가 된 도시인 티베리아스에서 따온 것이다.
요세푸스가 기록한 갈릴래아 호수
성경 이외의 고대 문헌 중에서 갈릴래아 호수에 대해 묘사하는 것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의 『유다 전쟁사』이다. 요세푸스는 기원후 38년경에 태어나 100년경에 죽은 유다인 역사가였다. 그는 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66~70년에 일어난 제1차 유다 봉기의 시작, 진행, 결과 등에 관한 역사 기록인 『유다 전쟁사』를 75년에서 79년 사이에 저술하였다. 『유다 전쟁사』 3권 506~509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겐네사렛 호수라고 불리는 것은 인접한 지역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호수의 너비는 40스타디온, 길이는 140스타디온 정도이다. 길다란 형태인 호수로 물맛이 달아 식수로 적합했다. 호수의 물은 두터운 침전물이 있는 늪지대의 물보다 더 맑고 깨끗했는데 이는 호수 전체를 둘러 자갈이나 모래로 이루어진 둑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길어 올린 물은 항상 적당한 수온을 유지하고 있으며 강물이나 샘물보다 맛이 부드럽고 시원하다. 넓은 호수의 물 치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지역 주민들이 여름날 밤에 하는 것처럼, 호수의 물을 떠서 공기 중에 놔두면 눈같이 차가워진다. 이 호수에 서식하는 물고기들은 그 맛과 모양이 다른 곳의 물고기들과는 다르다. 호수 한가운데는 요르단 강이 가로지른다.”
“겐네사렛 호수 주위에는 겐네사렛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뛰어난 지역이 있다. 이곳의 토양은 매우 비옥하기 때문에 온갖 종류의 식물들이 자라고 주민들은 모든 종류의 작물을 재배한다. 기후도 다양한 종류의 작물이 자라기에 적합하다. 다른 식물에 비해 특히 서늘한 기온을 필요로 하는 호두나무가 대량으로 재배된다. 높은 기온에서 잘 자라는 종려나무들 근처에는 온화한 기후를 좋아하는 무화과와 올리브나무가 자란다. 여러 작물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서로 경쟁을 벌이게 하는 자연의 내기 광경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사계절이 서로 우아한 다툼을 벌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곳의 토지는 함께 재배할 수 있다고 생각조차 못할 다양한 과실을 맺게 할 뿐 아니라 잘 익은 열매가 오랫동안 열릴 수 있게 해준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발견된 배
1986년 1월경 이스라엘에 큰 가뭄이 들어 갈릴래아 호수의 수면이 낮아지게 되었다. 당시 부근의 기노사르(Ginnosar) 키부츠에 살고 있던 루판 형제는 가뭄으로 드러난 호수의 개펄 위를 걷다가 어떤 배의 형체를 우연히 발견하였다. 그 후 이스라엘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체계적인 발굴이 진행되어 마침내 2월 26일에 배 전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약 2천년 동안 갈릴래아 호수 속에 잠겨져 있던 예수님 시대의 배가 역사상 최초로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길이가 8.2m, 폭이 2.3m의 목선인 이 배에는 돛이 있었고 열세 명가량이 탈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 배의 연대 측정을 위하여 다양한 방법들이 사용되었다. 선박 제조술뿐 아니라 배와 함께 발견된 토기와 등잔에 대한 분석, 그리고 사용된 나무 조각에 대한 탄소연대 측정의 결과 이 배는 기원전 1세기에 만들어졌고 기원후 70년경까지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배는 종종 “예수님 배(the Jesus boat)”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이 배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입증할 그 어떤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배가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 의해 물고기를 잡거나 호수를 건너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현재 이 배는 기노사르 키부츠의 이갈 알론 센터(Yigal Allon Centre)에 보관되어 있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2년 4월호]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5) 카파르나움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 출신인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마태 4,13) 그 후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래서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사시는 고을”(마태 9,1)로 불린다.
위치와 지형
구약성경의 카파르나움
구약성경에는 카파르나움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카파르나움이라는 지명은 히브리어로 “나훔의 마을”을 의미하는 케파르(Kefar) 나훔(Nahum)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이 나훔이 구약성경의 유명한 예언자 나훔과 동일한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른 나훔이라는 인물일 가능성이 더 많다.
신약성경의 카파르나움
카파르나움은 기원후 1세기의 신약성경 복음서와 요세푸스의 작품에서 언급된다. 그곳에는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집이 있었다.(마르 1,29) 마태 4,14~16은 예수님이 카파르나움에서 활동하신 것을 이사야의 예언(이사 8,23~9,1)이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한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마르 1,21~34 병행은 카파르나움에서의 예수님의 하루를 소개하는데, 이것은 그분의 전형적인 일상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그분 전체 활동의 축소판인 셈이다.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일은 가르침, 구마, 치유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카파르나움 세관의 세리를 제자로 부르시고(마르 2,14 병행), 그곳에 있던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신다.(마태 8,5~13 병행) 요한 6,22~59에서 예수님은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생명의 빵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은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마태 11,23)라는 말씀을 듣는다.
요세푸스의 카파르나움
기원후 1세기의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제1차 유다 봉기 당시 벳사이다에서 부상당하여 카파르나움에 옮겨진 일이 있었는데, 그 사건을 자신의 자서전인 『생애』 72에서 언급한다. 그리고 그는 『유다 전쟁사』 3권 519~520에서 카파르나움에 대하여 서술한다. 이 기록은 당시의 전설을 전하는데, 어떤 갈릴래아 사람들은 카파르나움 샘의 물이 나일 강에로 흘러간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겐네사렛 호수 주위) 이 지역이 이처럼 비옥한 것은 온화한 기후조건 외에도 주민들이 카파르나움이라고 부르는 매우 확실한 수원을 통해 풍부한 물이 공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샘이 나일 강의 지류라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알렉산드리아 호수에 서식하는 까마귀 물고기와 유사한 어종이 이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중요 순례 장소
① 베드로의 집터
② 팔각형 성당
1990년에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베드로의 집터 위에 어선 모양의 팔각형 성당을 건축하였다. 현재의 성당은 5세기에 세워졌던 팔각형 성당의 터 위에 지어진 것이다. 614년에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괴된 이후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있던 곳에 지어진 현재의 팔각형 성당 중앙 바닥은 유리로 되어 있어 그 아래의 베드로 집터와 본래의 팔각형 성당 터를 볼 수 있다.
③ 유다인 회당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2년 5월호]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6) 카나
갈릴래아 지방의 카나는 요한 복음서에서만 언급이 되는 장소이다. 이곳은 예수님이 어느 혼인 잔치에 참석하시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을 행하신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에는 카나의 자세한 지형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래서 카나의 정확한 위치에 대하여는 많은 논란이 있다.
위치와 지형
갈릴래아 지방에는 요한 복음서에서 언급된 카나에 해당할 수 있는 장소가 세 군데 있는데, 카프르 칸나(Kafr Kanna), 아인 카나(Ain Qana), 그리고 키르벳 카나(Khirbet Qana)이다. 첫째, 오늘날의 카프르 칸나는 어원적으로 “지붕의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진 곳이다. 이것은 케프르 켄나(Kefr Kenna)로도 불리는데 나자렛에서 북동쪽으로 5km 가량 떨어진 아랍인들의 마을이다.
이곳은 나자렛에서 티베리아스와 카파르나움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17세기경부터 성지순례자들은 이곳을 복음서의 카나로 여기고 순례하기 시작하였다. 둘째, 아인 카나, 즉 카나의 샘은 나자렛에서 약 북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있다. 셋째, 키르벳 카나는 나자렛에서 북쪽으로 14km 가량 떨어진 곳인데, 고대 거주지의 폐허로서 오늘날에는 더 이상 사람이 살지는 않는다. 이곳은 벳 네토파 계곡(Beth Netofa valley)의 북쪽에 있는 제벨 카나(Jebel Qana), 즉 카나 산의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한다. 많은 고고학자들은 키르벳 카나를 복음서의 카나와 동일시한다. 왜냐하면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 예수님 당시의 토기와 동전 등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명인 카나는 “갈대”를 의미하는데 키르벳 카나에는 갈대가 많은 지대가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의 카나
여호 16,8; 17,9에는 카나 천(Wadi Kanah)이 언급된다. 이 개천은 에프라임 지파와 므나쎄 지파의 경계선에 위치하는데 그리짐 산에서 시작하여 야르콘 강의 지류를 형성하며 지중해로 흐른다. 따라서 카나 천은 갈릴래아 지방이 아니라 사마리아 지방에 있다. 여호 19,28에는 아세르 지파의 영토 중에서 카나(Kanah)가 언급된다. 그러나 이곳은 티로(Tyre)의 남동쪽에 위치하며 갈릴래아 지방이 아니라 현재의 레바논에 위치한다.
신약성경의 카나
그후 요한 2,12은 예수님이 카파르나움으로 내려 가셨다고 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카나와 카파르나움 사이에 길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갈릴래아의 카나는 요한 4,46~54에서 다시 언급된다. 예수님이 카나로 가셨는데 왕실 관리가 와서 카파르나움에 있는 그의 아들을 고쳐 주십사 청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왕실 관리가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아들이 살아났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것이 예수님의 두 번째 표징이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을 단순히 기적이라 하지 않고 표징이라 한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그 일이 다른 어떤 실재를 가리키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서의 전반부(2~12장)를 “표징들의 책”이라 하고 일곱 표징 이야기가 서술되는데, 첫 번째 표징과 두 번째 표징이 모두 갈릴래아의 카나를 그 공간적인 배경으로 한다.
요한 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요한 21,2의 명단에 따르면 그 제자들은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등이다. 여기에서 나타나엘의 고향은 갈릴래아의 카나로 소개된다.
요세푸스는 자신의 자서전적 작품인 『생애』 86에서 잠시 동안 갈릴래아의 카나라는 마을에 살았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카나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는다.
중요 순례 장소
오늘날의 카프르 칸나에는 요한 복음서에서 언급된 갈릴래아의 카나와 관련이 있는 여러 순례 장소가 있다.
① 혼인잔치 기념 성당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1879년에 요한 2장의 혼인잔치가 열렸다고 전해지는 곳의 부지를 매입하여 1883년에 기념 성당을 건축하였다. 성당 지하에는 큰 돌로 된 물독이 있는데 라틴어로 “돌로 된 물독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요한 2,6)가 새겨져 있다.
이 기념 성당을 찾는 세계 각국의 순례자들은 카나의 혼인잔치를 기억하며 부부 혼인 갱신식을 거행하기도 한다.
② 나타나엘 기념 성당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혼인잔치 기념 성당 부근에는 요한 21,2에서 언급된 나타나엘을 기념하는 성당이 같은 수도회에 의해 세워졌다.
③ 그리스 정교회 성당
카프르 칸나에는 그리스 정교회의 기념 성당이 있다. 이 성당은 가톨릭의 혼인잔치 기념 성당보다 훨씬 앞선 시기인 1566년에 세워졌다. 이 성당 내부에는 예수님의 기적과 관련있다는 고대 돌 물독이 있고 성당 벽에는 1894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혼인잔치 그림이 있다.
④ 유다인 회당
고고학적인 발굴의 결과 기원후 5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다인들의 회당 터가 발견되었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2년 6월호]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7) 타보르 산
갈릴래아 지방에서 잘 알려진 산으로는 북쪽의 헤르몬 산, 남쪽의 카르멜 산과 타보르 산이 있다. 이중 타보르 산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거룩한 변모의 산으로 불리며 많은 성지 순례자들이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것은 이 산이 복음서(마태 17,1-9; 마르 9,2-10; 루카 9,28-36)에 나오는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위치와 지형
타보르 산은 히브리어로 하르 타보르, 즉 “높은 산”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사실 타보르 산은 일찍이 경신례의 장소로 사용되었다.(호세 5,1; 신명 38,18-19 참조)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타보르의 명칭이 기원전 3000-500년 사이 이 지역에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메소포타미아의 신 타무즈(Tammuz)의 다른 이름인 “티비라(Tibira)”에서 유래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구약성경의 타보르 산
예레미야 예언자는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위용을 “산들 가운데에서는 타보르 같고 바닷가에서는 카르멜 같은 자”로 표현한다.(예레 46,18) 그리고 시편 89,13은 갈릴래아 지방의 타보르 산과 헤르몬 산을 “북녘과 남녘을 당신께서 만드시니 타보르와 헤르몬이 당신 이름에 환호합니다.”로 노래한다. 그리스 시대에는 타보르 산에 프톨레마이오스 제국이 요새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안티오코스 3세가 기원전 218년에 점령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더 얀내우스(103-76년)는 스키토폴리스, 가다라 등과 함께 타보르 산을 통제하였다.
한편 창세 14,17 이하에 따르면 살렘 임금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인 멜키체덱이 사웨 골짜기 곧 임금 골짜기에서 아브라함을 만났다. 사실 우리는 이 골짜기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 중세기의 전설에 의하면 멜키체덱이 아브라함을 만난 곳이 바로 타보르 산이라는 것이다. 12세기 초반의 순례자 아봇 다니엘(Abbot Daniel)이 타보르 산의 한 동굴에서 멜키체덱이 살았다고 주장하였다.
신약성경의 타보르 산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곳을 마태 17,1와 마르 9,2는 “높은 산”이라 하고, 루카 9,28은 단순히 “산”이라고 언급한다. 즉 복음서들은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는다. 마르 9,2-6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 높은 산은 어디일까?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사건을 갈릴래아 지방에서 일어난 것으로 소개한다. 그렇다면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는데 헤르몬 산과 타보르 산이다. 사실 비잔틴 시대에도 이 두 가능성을 두고 유동적이었다. 에우세비오(340년 사망)는 두 곳 중에 하나를 확정하지 못하였다. 심지어 보르도(Bordeaux)의 순례자들(333년)은 올리브 산을 생각하였다. 그런데 348년에 예루살렘의 주교 치릴루스는 타보르 산을 주님의 거룩한 변모의 산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에피파니우스와 예로니모가 이를 확증하였다. 이보다 앞서 326년에 이미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가 타보르 산 정상에 경당을 세웠다.
요세푸스의 타보르 산
로마 제국에 대항한 유다인들의 제1차 봉기 때 갈릴래아 유다인 군대의 사령관이었던 요세푸스는 타보르 산에 성벽을 구축하였다.(『유다 전쟁사』 2권 573) 그는 로마 군대가 갈릴래아를 공격할 것을 예견하여 여러 지역에 성벽을 만들었던 것이다.
중요 순례 장소
타보르 산에는 기원 후 4세기 이후 많은 순례자들이 모여 들었다. 6세기경 큰 성당이 세 개 세워졌으나, 페르시아군에 의해 614년에 파괴되었다. 그후 십자군과 이슬람이 서로 번갈아 차지하다가, 마침내 1631년에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산 정상에 수도원과 성당을 건립하였다. 현재 타보르 산 정상은 가톨릭 지역과 그리스 정교회 지역으로 나뉜다.
① 주님의 거룩한 변모 기념 성당
현재의 성당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1919년에 짓기 시작하여 1924년에 완공한 것으로 성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들 중의 하나이다. 성당 정면 양쪽에는 두 개의 종탑이 솟아 있고 그 아래에는 각각 모세와 엘리야에게 봉헌된 경당이 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기념 성당 안 정면에는 중앙 제대가 있고 복음서의 변모 이야기가 모자이크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왼쪽에는 성모님께 봉헌된 제대, 오른쪽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봉헌된 제대가 있다. 중앙 제대 아래에도 아름답게 꾸며진 경당이 있다.
② 그리스 정교회 엘리야 성당
그리스 정교회 지역에는 1911년에 세워진 엘리야 성당이 있는데, 붉고 둥근 지붕을 가졌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2년 7월호]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8) 타브가 - 1
갈릴래아 지방의 타브가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세 이야기, 즉 예수님이 행하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마르 6,34-44 병행),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장면(요한 21장), 예수님의 산상설교(마태 5-7장)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타브가에는 이 세 이야기와 관련된 기념 성당 곧 빵의 기적 기념 성당, 베드로 수위권 성당, 참행복 선언 기념 성당이 있다.
위치와 지형
타브가는 겐네사렛과 카파르나움의 중간쯤에 위치하며, 갈릴래아 호수의 북서쪽 연안에 있다. 거리상으로는 카파르나움에서 남쪽으로 약 3km, 티베리아스에서 북쪽으로 약 12km 떨어진 곳이다. 타브가(Tabgha)라는 아랍어 명칭은 “일곱 샘”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헤프타페곤(Heptapegon)에서 유래했는데, 히브리어로는 엔 쉐바(Ein Sheva)이다. 이 명칭에 나오는 일곱이라는 숫자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숫자를 합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중요 순례 장소
① 빵의 기적 기념 성당
● 예수님이 행하신 빵의 기적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 중에서 네 복음서 모두에 언급되는 것은 바로 빵의 기적이다.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마태 14,13-21; 마르 6,34-44; 루카 9,10-17; 요한 6,1-14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마태 15,32-39; 마르 8,1-9에 나온다.
사실 오늘날의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신 빵의 기적들이 실제로 어디에서 일어났는지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복음서의 본문들은 예수님의 빵의 기적이 현재 타브가가 있는 갈릴래아 호수의 북서쪽이 아니라 동편 어느 외딴 곳에서 일어났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
역사적으로 볼 때 초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갈릴래아 호수의 동편으로 순례 가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그것은 호수의 북동쪽이 지형적으로 아주 험준하고 외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3세기경부터 성지를 순례한 이들은 빵의 기적을 기념하는 장소로 호수의 북서쪽에 있는 오늘날의 타브가를 찾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마르 6,34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마르 8,2에도 예수님은 “저 군중이 가엾구나.”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빵의 기적과 관련하여 “가엾은 마음이 들다”라는 동사를 만난다. 이 동사는 예수님의 자비, 연민, 측은지심을 표현한다. 사실 그리스어에서 “가엾은 마음이 들다”라는 동사는 “사람의 창자, 내장”을 가리키는 단어와 관련이 있는데, 인간의 내면 깊숙이에서, 즉 그 속마음에서 불쌍한 마음이 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 즉 함께 아파하기를 의미한다. 복음서에서 특히 이 동사는 예수님의 에토스를 가장 잘 표현한다.
마르 6,38-44은 빵의 기적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
● 에제리아의 기록
기원후 381에서 384년 사이에 타브가 지역을 순례하였던 에제리아(Egeria)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매우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카파르나움과 가까운 그곳에는 주님이 오르셨던 돌계단이 있었다. 호수 가까이에 있는 거기에는 많은 풀과 종려나무가 있는 들판이 있었다. 이 나무들 근처에는 풍부한 양의 물을 가진 일곱 샘이 있었다. 그곳은 주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군중을 배불리 먹이셨던 곳이다. 주님이 빵을 올려놓으셨던 바위는 제단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 바위의 작은 조각들을 자신들의 행운을 위해 떼어 갔는데 효과가 있었다.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은 타브가와 관련하여 세 개의 바위에 관한 기억을 전하는데, 이것은 세 개의 기념성당인 빵의 기적 기념 성당, 베드로 수위권 성당, 참행복 선언 기념 성당과 각각 관련이 있다.
● 기념 성당
앞서 살펴본 에제리아에 따르면, 350년경에 이미 예수님이 빵을 올려놓으셨던 바위를 제단으로 하는 빵의 기적 기념 성당이 세워졌었다. 이 성당은 그 후 419년의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그래서 5세기 비잔틴 시대에 다시 기념 성당이 세워졌지만 이 또한 551년에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그 후 폐허로 남아있던 중에 1887년에 독일 고고학자들의 발굴이 시작되어 이전 시기 성당의 터와 비잔틴 시대 성당에 있던 다양한 모자이크들이 발견되었다. 특히 1932년의 고고학적 발굴은 비잔틴 시대의 많은 유물들을 발견하였다. 그 후 1936년에 독일 가톨릭 교회는 새로 발견된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위에 새로운 성당을 세웠다. 이 모자이크를 그대로 방치하면 훼손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성당은 빵 네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모자이크가 성당의 제단 앞에 자리하도록 설계되었다.
현재의 빵의 기적 기념 성당은 1982년에 증축된 것으로서 독일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특히 현재의 성당은 비잔틴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성당 안쪽 제단 앞에는 그 유명한 빵 네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비잔틴 시대 모자이크가 있다. 그리고 현재의 성당 바닥에는 갈릴래아 지방의 동식물을 다양하게 표현한 비잔틴 시대 모자이크들이 많다. 이것은 당시 갈릴래아의 생태계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제단 바로 아래에는 앞서 살펴본 에제리아의 기록에서 언급된 바위가 있는데, 바로 예수님이 빵을 올려놓으셨다고 전해지는 바위이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2년 8월호]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9) 타브가 - 2
중요 순례 장소
② 참행복 선언 기념 성당
지난 호에서 살펴본 빵의 기적 기념 성당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티베리아스와 카파르나움을 잇는 길을 건너 약 200m 정도 가면 언덕 위에 아름다운 팔각형의 참행복 선언 기념 성당이 있다.
● 예수님의 참행복 선언
예수님은 마태 5-7장의 산상설교를 참행복 선언으로 시작하신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10)
● 에제리아의 기록
4세기에 이 지역을 순례한 에제리아(Egeria)는 “근처 산 위에는 주님이 오르셔서 참행복 선언을 말씀하신 동굴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실제로 4세기 말경에는 이 동굴 위에 작은 성당이 세워졌다.
● 기념 성당
예수님의 참행복 선언을 기념하는 4세기의 성당은 그후 7세기에 파괴되었다. 마침내 1938년 이탈리아의 프란치스코 수녀회에서 팔각형 모양의 새로운 기념 성당을 건립하였다. 이 성당을 설계한 이탈리아의 건축가 바를루치(Barluzzi)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덟 개의 참행복을 상징하는 의미로 팔각형의 구조를 구상하였다. 그래서 성당 안의 여덟 벽면에는 마태 5,3-10의 여덟 개의 참행복 선언이 라틴어로 된 스테인드글라스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성당 바닥에는 향주삼덕(向主三德)인 믿음(fides), 희망(spes), 사랑(charitas)과 사추덕(四樞德)인 지혜(prudentia), 정의(justitia), 용기(fortitudo), 절제(temperantia)가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언덕 위에 위치한 참행복 선언 기념 성당의 주변 경치는 참으로 감탄을 자아낼 만큼 아름답다. 갈릴래아 호수와 그 주변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사셨고 활동하신 여러 지역들을 조망할 수 있다. 기념 성당 주변에는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는데, 소규모로 둘러 앉아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장소들이 준비되어 있다. 이 절경 안에서 예수님이 참행복을 말씀하신 당시의 상황을 그려보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을 통해 마치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당시의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더욱 실감이 나는 일이다.
빵의 기적 기념 성당에서 갈릴래아 호수가 있는 쪽인 남동쪽 방향으로 약 500m 가량 가면 베드로 수위권 성당이 있다.
● 예수님과 베드로
요한 21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티베리아스 호수, 곧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를 전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뒤 다시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 잡는 어부의 생활로 되돌아 갔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밤새 아무 것도 잡지 못한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6절)라고 하셨다. 많은 고기를 잡은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9절)라고 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12절)고 초대하신다. 이렇게 제자들과 아침 식사를 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와 대화하신다.(15-19절) 세 차례에 걸쳐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역시 세 차례에 걸쳐 “내 양들을 돌보아라.’하고 분부하신다.
● 에제리아의 기록
에제리아의 기록에는 “주님이 오르셨던 돌계단”이 언급되어 있다. 이 돌계단은 오늘날 기념 성당 옆에서 확인할 수 있다. 4세기경에 기념 성당이 세워졌는데, 1935년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비잔틴 시대의 성당 흔적과 모자이크 등이 발견되었다. 이 성당은 편평한 바위 둘레에 건축되었는데, 그 바위는 요한 21,9에서처럼 예수님과 제자들이 아침 식사를 한 식탁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곳은 9세기 기록에 따르면 “숯불 자리(the Place of the Coals)”라고 불렸다. 그런데 이 비잔틴 시대의 성당은 13세기에 파괴되었다.
808년에 기록된 문헌에는 열두 옥좌 성당과 그 안에 있는 주님의 식탁이 언급되어 있다. 열두 옥좌와 식탁의 모티프가 연결된 것은 요한 21장과 루카 22,28-30과 관련이 있다. 루카 복음서에서 제자들과 최후만찬을 드신 예수님은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30절)라고 말씀하신다. 옛 그리스도인 순례자들은 에제리아가 언급한 돌계단 주변에 심장 모양의 6개 원기둥 받침을 놓았는데 오늘날에도 그것을 볼 수 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1889년에 이 지역을 구입하였는데, 현재의 기념 성당은 1933년에 세워졌고 1982년에 재건축되었다. 이 아담한 기념 성당은 현무암의 벽돌로 지어졌는데 출렁이는 갈릴래아 호수의 물이 성당 벽에 부딪친다. 현재의 성당에 있는 제대 앞에는 요한 21장의 이야기와 관련있는 “그리스도의 식탁(Mensa Christi)”이라고 불리는 바위가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바위는 성당 바깥에로 연결되어 있다.
성당 바깥에는 예수님과 사도 베드로의 청동상이 있다.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지팡이를 받고 있는 모습인데, “내 양들을 돌보아라.”하고 분부하신 장면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고 성당 정원에는 1964년의 교황 바오로 6세와 2000년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을 기념하는 야외 미사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2년 9월호]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10) 벳사이다. 송창현(미카엘)|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위치와 지형
벳사이다라는 이름은 “고기잡이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아람어 단어에서 유래하였다. 어촌이었던 벳사이다는 갈릴래아 호수의 북동쪽으로 약 2km, 곧 요르단강 상류가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드는 곳에 위치하였다. 현재 888번 도로의 벳사이다 교차로로부터 북쪽으로 750m 지점이다. 벳사이다는 비옥한 평야를 끼고 있는 하부 골란 고원의 서쪽에 위치한다.
신약성경의 벳사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 안드레아, 필리보는 벳사이다 출신이다. 요한 1,44에 따르면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벳사이다 출신이었다.” 여기서 안드레아와 필리보라는 제자들의 이름은 둘다 셈족어 방식이 아닌 그리스식 이름이다. 이것은 당시 벳사이다가 헬레니즘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리고 요한 12,20-21에는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그들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라고 언급된다. 여기서도 벳사이다 출신인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리스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예수님은 벳사이다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마르 8,22-26에 따르면 예수님은 눈먼 이를 고쳐주셨다. “그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루카 9,10-17에서 예수님은 벳사이다라는 고을로 물러가셔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갈릴래아의 여러 고을에서 기적을 많이 일으키셨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그분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꾸짖으셨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1-24)
요세푸스가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통치 제13년, 즉 93-94년에 쓴 『유다 고대사』는 스무 권으로 된 방대한 작품으로서, 창조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제1차 유다 봉기의 발발까지의 역사를 서술한다. 『유다 고대사』 18권 28에는 벳사이다가 언급된다. “필리포스는 겐네사렛 호수에 위치한 벳사이다를 고을에서 도시로 승격하였다. 그곳은 주민이 많고 웅장했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딸 이름을 따서 율리아스(Julias)로 불리었다.” 필리포스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로서 기원전 4년-기원후 34년에 갈릴래아 호수의 북동부 지방인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였다. 그는 기존의 벳사이다를 도시로 확장하였다. 그런데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부정확한 점이 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기원전 27-기원후 14년)의 딸인 율리아, 즉 리비아(Livia)는 기원후 2년에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사실 필리포스가 벳사이다를 율리아스라고 부른 것은 티베리우스 황제(14-37년)의 어머니, 즉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아내인 율리아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녀는 기원후 29년에 죽었다. 필리포스는 30년경에 “율리아 아우구스타”(Julia Augusta)라는 명각과 함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아내인 리비아의 상을 새긴 동전을 만들었다. 필리포스는 34년에 벳사이다, 곧 율리아스에서 죽었고 그곳에 매장되었다고 하나(『유다 고대사』 18권 4.6), 그 무덤의 위치를 알 길이 없다.
이와 같이 기원후 1세기 말에 기록된 요세푸스의 『유다 고대사』는 벳사이다를 율리아스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가장 먼저 쓰여진 복음서로서 70년 경에 집필된 마르코 복음서는 벳사이다로만 언급한다. 따라서 마르코 복음서는 기원후 30년 이전의 전승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벳사이다의 폐허에 대한 고고학적인 발굴은 1987년에 네브라스카 대학교(University of Nebraska)의 고고학자 라미 아라브(Rami Arav)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벳사이다의 가옥 형태가 드러났다. 기원전 2세기-기원후 1세기에 지어진 어떤 집은 13.5m×7m 규모의 돌이 깔린 안뜰을 가진 형태를 가진 것으로, 그곳에서 다양한 고기 잡는 도구들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발견된 도구들은 낚시 바늘, 그물추, 돛을 만들거나 수리하는데 사용된 굽은 청동 바늘 등이다. 그래서 이 가옥을 “어부의 집”이라 부른다. 그리고 포도주를 만드는 사람의 집으로 추정되는 가옥 구조도 발견되었다. 그곳에서는 포도주 저장실, 포도주 담는 항아리들과 갈고리 등이 발견되었다.
아라브는 1996년의 고고학적 발굴에서 기원전 10-9세기경으로 추정되는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을 발견하였다. 벳사이다에서 발견된 네 개의 방을 가진 성문 구조(four chambered gate)는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것으로서 제법 규모가 큰 성문이었다. 아라브는 성문에서 산당(high place)과 세워진 두 개의 돌(standing stone)도 발견하였는데 그중 하나에는 황소 모양의 전사가 새겨져 있다. 벳사이다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는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고 있다. 이곳에서의 고고학적 발굴은 향후 신약성경과 역사적 예수 연구를 위한 흥미로운 결과들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2년 10월호]
복음서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이름 중에는 마리아 막달레나(마태 27,56.61; 28,1; 마르 15,40.47; 16,1.9; 루카 24,10; 요한 19,25; 20,1.18) 혹은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가 있다. 이 이름은 막달라 마을 출신 마리아라는 뜻이다. 사실 이 여인과 관련 있는 막달라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발견되었다.
위치와 지형
갈릴래아 호수의 서쪽에 위치한 막달라는 티베리아스에서 북쪽으로 약 4km, 카파르나움에서 남쪽으로 약 5km 떨어진 곳에 있다. 지금의 막달라에는 옛 도시의 폐허만 남아있다. 막달라 주변 지역은 겐네사렛(Gennesaret) 땅이라고 불리는 비옥한 곳이다. 이 지역의 명칭은 아마도 막달라 북쪽의 옛 도시 겐네사렛 때문이든지 갈릴래아 호수가 겐네사렛 호수(마르 6,53)로도 불렸기 때문일 것이다. 요세푸스의 『유다 전쟁사』 3권 516-517에는 이 지역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주민들은 모든 종류의 작물을 재배한다. 기후도 다양한 종류의 작물이 자라기에 적합하다. 다른 식물에 비해 특히 서늘한 기온을 필요로 하는 호두나무가 대량으로 재배된다. 높은 기온에서 잘 자라는 종려나무들 근처에는 온화한 기후를 좋아하는 무화과와 올리브나무가 자란다.”
막달라(Magdala)의 이름은 “탑, 망루”를 뜻하는 히브리어와 아람어의 미그달(Migdal)에서 유래했다. 아마도 이곳에 유명한 망루가 있었을 것이다. 기원후 1세기 전반부에 막달라는 물고기를 잡아 준비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막달라는 아람어로 “고기잡이의 망루”를 뜻하는 미그달 누나야(Migdal Nunayah)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그리스어로는 타리케아(Taricheae)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소금에 절인 물고기”이다. 사실 그리스어 타리케이아이(taricheiai)는 “물고기를 소금에 절이는 작업장”을 가리킨다.
역사적으로 보면, 로마제국의 네로 황제가 아그리파 2세(53-100년?)에게 막달라를 주었을 때 도시의 이름을 타리케아로 바꾸었다. 요세푸스는 『유다 고대사』 20권 159에서 이 명칭을 사용한다. 사실 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일어난 유다인들의 제1차 봉기 시기에 갈릴래아 유다인 군대의 사령관이었던 요세푸스는 막달라를 요새화하였다. 그러나 티베리아스에서 한 것처럼 튼튼하게 성벽을 세우는데 필요한 자원을 가지지는 못했다.(『유다 전쟁사』 3권 464-465) 막달라는 갈릴래아에서의 군사 작전을 위한 기지가 되었는데(『생애』 156-164), 실제로 막달라에서 로마군대와 유다인 저항군 사이에 중요한 전투가 있었다.(『유다 전쟁사』 3권 462-542) 요세푸스는 기원후 67년경에 막달라의 인구가 40,000명이었다고 기록하는데 이것은 과장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신약성경의 막달라
루카 8,1-3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다른 여인들 가운데에서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여인으로 소개된다. :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마르 15,40-41 등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켜본 여인들 중의 하나로 소개된다. 그리고 그녀는 마르 16,1-8; 요한 20,11-18 등에서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인물이다.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마르 16,1-2) 요한복음서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8) 그리고 마르 8,1-10에서 예수님은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 여기서 언급되는 달마누타(Dalmanutha)는 막달라의 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있다.
요세푸스의 막달라
요세푸스는 타리케아, 곧 막달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타리케아는 강력한 요새도시이자 지역주민들이 겐네사렛이라고 부르는 호수에 접해 있어서 방어에 유리한 입지를 갖춘 곳이었으며 반란군 전체가 여기에 집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타리케아도 티베리아 처럼 산기슭에 세워진 도시로, 요세푸스가 호수에 맞닿아 있는 부분을 포함한 도시의 모든 면에 견고한 성벽을 쌓아올렸던 곳이다. 물론 그 성벽은 티베리아만큼 견고하지는 않았다. 티베리아 성벽은 반란 초기에 요세푸스가 직접 많은 자금과 많은 힘을 들여 축조했던 반면 타리케아는 그 나머지 자금만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이다.”(『유다 전쟁사』 3권 463-465)
그리고 그는 기원후 67년경에 막달라 부근에서 일어난 전투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다시 진군하여 티베리아와 타리케아의 중간 지점에 진을 쳤다. … 뗏목이 완성되자 베스파시아누스는 호수로 도망친 적들을 상대하기에 충분한 규모의 부대를 뗏목에 태워 호수로 진격시켰다. 호수 위에서 로마군에게 쫓겨 한곳으로 집결한 유다인들은 로마군이 사방으로 포진한 육지로 도망칠 수도 없었고 그들과 대등하게 해전을 벌일 수도 없었다. 유다인들의 배는 크기가 작고 약탈용으로만 적합했기 때문에 로마군의 뗏목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온갖 방식으로 수많은 유다인들이 호수 곳곳에서 죽어갔고 끝까지 살아남은 자들은 배가 포위된 채로 호수 기슭으로 내몰려서 도망쳤다. … 그러나 배가 기슭에 닿기도 전에 많은 수의 유다인이 상륙 도중 창에 찔려죽었고, 육지로 올라온 자들도 그곳에 대기 중이던 로마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에 호수는 피로 물들고 시체가 넘쳐났다.”(『유다 전쟁사』 3권 462-530)
고고학적 발굴
고고학자 코보(V. Corbo)는 1971-1973년, 1975-1976년에 막달라를 발굴하였다. 도시는 인상적인 거리들과 샘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샘은 오늘날에도 솟는다. 그리고 막달라에는 기원전 1세기에 세워져서 기원후 1세기 중반까지 사용된 작은 회당도 발견되었다. 고고학 탐사는 도시 남쪽에서 망루의 기초도 발견하였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2년 11월호]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12) 카이사리아 필리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한 것은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는 길에서 일어났던 일이다.(마르 8,27-30) 예수님 당시에 갈릴래아의 영주는 헤로데 안티파스였고 카이사리아 필리피는 그의 동생 필리포스(Philip)가 다스리던 지역에 속하였다. 루카 3,1은 세례자 요한의 활동 시작을 말하며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라고 언급한다.
위치와 지형
해발 320m의 카이사리아 필리피는 티로(Tyre)에서 다마스쿠스(Damascus)로 가는 길에 위치한다. 이곳은 텔 단에서 약 4km 떨어져 있고, 갈릴래아 호수로부터는 약 60km 떨어져 있다. 해발 2,814m의 헤르몬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카이사리아 필리피에는 큰 동굴이 있고 거기에서 오늘날에도 초당 20㎥의 지하수가 솟아오르는데 이것이 요르단 강 상류의 중요한 수원 중의 하나이다. 지진으로 인해 동굴 아래에서 지하수가 흘러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카이사리아 필리피는 아랍어로 바니아스(Banyas, Banias)라고 불렸는데 이 이름은 그리스어 파네아스(Paneas)가 변형된 것이다. 파네아스라고 불렸던 이유는 이곳이 판 신(God Pan)을 경배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기원전 20년에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Augustus Caesar)는 이곳을 헤로데 대왕(Herod the Great)에게 주었다. 헤로데는 아우구스투스에게 경의를 표시하기 위하여 큰 동굴 앞에 흰색 대리석의 신전을 건축하였다. 헤로데의 아들 필리포스는 이곳을 재건하여 자신의 수도로 삼았고 티베리우스 카이사르(Tiberius Caesar)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카이사리아로 이름을 바꾸었다. 카이사리아로 불렸던 다른 도시들, 특히 지중해 연안의 카이사리아와 구별하기 위하여 자신의 이름인 필리포스를 붙여서 필리포스의 카이사리아, 즉 카이사리아 필리피(Caesaea Philippi)라고 불렀다.
신약성경의 카이사리아 필리피
마르 8,27-30에 따르면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 그리스어인 “그리스도”는 히브리어인 “메시아”, 즉 “기름부음 받은 이”를 의미한다. 예수님 당시의 제2성전 유다이즘에서 “메시아”란 “하느님으로부터 보내어진 왕이나 사제 혹은 다른 인물로서 마지막 시대에 구원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이”를 가리킨다. 이 그리스도 고백의 공간적 배경이 바로 카이사리아 필리피이다.
마태 16,18-19에 따르면 베드로의 고백 직후에 예수님은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역사가들의 카이사리아 필리피
헬레니즘 시대의 역사가인 폴리비우스(기원전 200-118년경)는 자신의 저서『역사서』 16.18.2; 28.1.3에서 파네아스와 관련된 역사 기록을 남겼다. 기원전 200년에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는 파네아스에서의 전투에서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승리하여 팔레스티나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다. 폴리비우스가 이 장소를 판 신과의 관련 하에 기록한 것으로 보아 프톨레마이오스인들은 이미 이집트에서 판 신을 경배하였고, 이 신을 위한 경배 장소를 이곳에 세웠다는 것을 말한다.
로마 제국 시대의 원로 플리니(기원후 23-79년경)는 『자연사』 5권 71에서 카이사리아 파네아스(Caesarea Paneas)라는 지명을 사용하였다.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기원후 38-100년경)는 『유다 전쟁사』 7권 23-24에서,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을 함락한 티투스가 전원적인 카이사리아 필리피로 갔다고 기록한다. “티투스는 해변에 위치한 카이사리아를 떠나 카이사리아 필리피로 갔다. 그는 한참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갖가지 유흥을 즐겼다. 포로들은 사나운 맹수의 먹이로 던져졌고, 일부는 편을 갈라 전투 시합을 벌이게 하여 많은 수의 포로가 죽음을 당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서는 마르 8,27; 마태 16,13에서처럼 카이사르와 필리포스의 두 이름을 딴 카이사리아 필리피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요세푸스는 『유다 전쟁사』 1권 404에서 “헤로데는 황제가 그에게 또 다른 지역을 덧붙여 하사하였을 때, 거기에도 흰색 대리석의 신전을 지어 그에게 헌정하였다. 그곳은 요르단 강 발원지로 파니아스라고 부르는 곳이었다.”라고 기록한다. 그리고 『유다 전쟁사』 2권 168에서 “필리포스는 파니아스 지역의 요르단 강 수원지 근처에 카이사리아를” 건설하였다고 언급한다. 또한 『유다 전쟁사』 5권 512-513에서는 “오랫동안 이곳이 요르단 강의 발원지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지만 트라코니티스의 영주 필리포스가 최초로 그 사실을 입증해냈다. 필리포스는 왕겨를 피알라에 던져 넣게 했는데 그 전까지 요르단 강의 수원으로 알려졌던 파니아스에서 그 왕겨가 떠올랐던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 필리포스의 아들 헤로데 아그리파는 동굴의 남쪽에 궁전을 건축하였는데, 이것을 네로 황제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네로니아스(Neronias)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이름은 오래 사용되지 않았다.(『유다 고대사』 20권 211)
그리스도교 시대에 카이사리아 필리피는 주교좌가 되었고, 그곳의 주교는 325년의 니체아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고고학적 발굴
카이사리아 필리피에는 1967년까지 아랍인들의 마을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6일 전쟁 때 파괴되어 현재는 폐허로 남아있다. 고고학적으로는, 폴리비우스가 언급한 판 신을 위한 경배 장소의 흔적이 이곳 큰 동굴 안에서 발견되었다. 1837년의 지진에 의해 동굴의 천장이 무너졌는데 이때 헬레니즘 시대의 전당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헤로데 대왕이 아우구스투스를 위해 세운 흰 대리석 신전의 기초도 발견되었다.
카이사리아 필리피에 있는 큰 동굴의 남쪽에는 헤로데 아그리파가 건축한 크고 정교한 궁전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궁전이 티투스가 쉬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이 큰 동굴의 동쪽에는 판 신과 관련 있는 전당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기원후 2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명각들(inscriptions)이 발견되었는데 이곳의 지명이 언급된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2년 12월호]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13) 예리코 1
예리코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이다. 그리고 예리코는 구약뿐 아니라 신약성경에도 등장한다. 그래서 오랜 역사를 가진 이 도시의 터는 구약 시대의 예리코, 신약 시대의 예리코, 그리고 오늘날의 시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 위치와 지형
루카 10,29-37에서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다음과 같이 시작하신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과 예리코의 지형적 위치를 잘 표현한다. 예루살렘은 평균 해발 760m에 있는데, 이곳에서 동쪽으로, 즉 유다 광야로 39km 가량 내려가면 해수면 보다 258m 낮은 곳에 예리코가 위치한다. 따라서 예루살렘과 예리코의 고도차는 1,000m나 된다. 예리코는 사해에서 북서쪽으로 약 11km 떨어져 있고, 요르단 강에서는 서쪽으로 약 8km 되는 지점에 있다. 예리코는 유다 광야의 경계에 해당하는데 오늘날의 시가지에서 북쪽으로 약 2km 가면 분당 4,500 리터의 물을 내는 술탄 샘(En es-Sultan)이 있다. 물이 귀한 이 지역에서 큰 샘인 셈이다. 이처럼 물이 풍부한 까닭에 예리코에는 직경 5km의 초원이 형성되어 있다.
■ 구약성경의 예리코
예리코에는 일찍이 종려나무가 많이 재배되었는데 신명 34,3에 따르면 “종려나무 성읍 예리코”로 소개된다. 여호 2,1-6,27에는 예리코 점령 이야기가 서술된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의 광야 생활을 거친 후 여호수아의 영도 하에 요르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가로막았던 성읍이 바로 예리코였다. 하느님은 여호수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보아라, 내가 예리코와 그 임금과 힘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다. 너희 군사들은 모두 저 성읍 둘레를 하루에 한 번 돌아라. 그렇게 엿새 동안 하는데, 사제 일곱 명이 저마다 숫양 뿔 나팔을 하나씩 들고 궤 앞에 서라. 이렛날에는 사제들이 뿔 나팔을 부는 가운데 저 성읍을 일곱 번 돌아라. 숫양 뿔 소리가 길게 울려 그 나팔 소리를 듣게 되거든, 온 백성은 큰 함성을 질러라. 그러면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여호 6,3-5)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렛날에 “사제들이 뿔 나팔을 부니 백성이 함성을 질렀다. 백성은 뿔 나팔 소리를 듣자마자 큰 함성을 질렀다. 그때에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백성은 저마다 성읍을 향하여 곧장 앞으로 올라가서 그 성읍을 함락하였다.”(여호 6,20)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는 예리코에 예언자들의 학교가 있었다. 2열왕 2장의 해당 본문은 다음과 같다.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너는 여기 남아 있어라. 주님께서 나를 예리코로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사는 ‘주님께서 살아 계시고 스승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저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예리코로 내려갔다. 예리코에 있던 예언자 무리가 엘리사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주님께서 오늘 당신의 주인님을 당신에게서 데려가려고 하시는데 알고 계십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나도 알고 있으니 조용히 하시오.’”(4-5절) “예리코에서 온 예언자 무리가 멀리서 그를 보고, ‘엘리야의 영이 엘리사에게 내렸구나.’ 하고 말하였다.”(15절)
그리고 엘리사가 예리코 근처의 샘을 정화한 이야기는 2열왕 2,18-22에 나온다. “(그들이) 예리코에 머물러 있는 엘리사에게 돌아왔다. 엘리사는 그들에게 ‘내가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하고 말하였다.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어르신께서 보시다시피 이 성읍은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나빠서 이 땅이 생산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말에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가져오시오.’ 하고 일렀다. 그들이 소금을 가져오자, 엘리사는 물이 나오는 곳에 가서 거기에 소금을 뿌리며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 물을 되살렸으니, 이제 다시는 이 물 때문에 죽거나 생산력을 잃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자 그 물은 엘리사가 한 말대로 되살아나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샘이 바로 오늘날에도 술탄의 샘이라고 부르는 “엘리사의 샘”이다.
■ 요세푸스의 예리코
요세푸스는 『유다 전쟁사』 4권 459-475에서 예리코에 대하여 매우 아름답게 묘사한다. 이 기록은 앞서 살펴본 2열왕 2,18-22의 이야기를 확대한 것이다.
〈그리고 예리코 근처에는 들판을 적셔주기에 풍부하게 넘치는 샘이 있었다. 이 샘은 히브리인들의 장군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서 처음으로 전쟁을 통하여 정복한 옛 도시 주변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이 샘에는 이와 같은 말이 전해 내려왔다. 즉 이 샘에서는 예전에는 땅과 나무들의 열매들의 소출만이 아니라, 여자들이 낳은 아이에게도 좋지 않은 물이 흘러나와서, 실제로 사람이 질병에 걸리거나 심지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언자 엘리사에 의해 물이 바뀐 후에는 이와는 반대로 몸에 유익할 뿐만 아니라 풍성한 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는 엘리야의 제자요, 후계자로서, 예리코의 주민들은 그를 받아들여 매우 친절하게 대접하였다. 그러자 그는 이들과 그 땅 전체에 영원히 남을 보답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 샘에 가서 소금이 가득한 그릇을 물에 던진 후, 의로운 오른손을 하늘을 향해 들고 술을 땅에 부으면서 청하기를, 이 물이 순하게 되고, 단물 줄기를 열어주시며 하늘은 풍요한 공기를 이 물에 넣어 이 지역의 주민들에게 풍요한 소출뿐만 아니라 자손의 축복을 주시고, 뿐만 아니라 이들이 의롭게 살아가는 한 이러한 풍요의 물이 그들에게 마르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엘리사가 이 기도를 하고, 여기에 매우 노련한 손동작을 더하자 샘물이 변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이제까지 아이들을 갖지 못하게 하고 기근을 일으켰던 이 샘물은 자손의 축복과 풍작을 가져다주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물은 땅에 물을 대는 데 있어서 땅에 완전히 침투하기까지 고여 있는 다른 물보다 더욱 효과적인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물을 사용하면 충분한 양을 주어야 하지만 이 물은 그 사용량이 얼마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은 양에서 오는 부가가치는 엄청난 것이다. 실제로 이 샘물은 다른 물줄기보다 더 많은 땅에 물을 댈 수 있었는데, 길이 70 스타디온, 폭 20 스타디온의 평야를 적셨으며, 아름답고 빽빽이 서 있는 정원에 인접해 있었다. 이 물로 자라나고 있는 나무들 가운데 여러 종류의 맛과 효능을 가 진 종려나무들이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잘 익은 열매를 발로 밟아 이기면, 풍성한 꿀을 내는데, 이는 다른 어떤 꿀에 못지않은 것이었다. 그밖에도 이 지역은 벌들이 살아갈 양분을 주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볼 때, 따뜻한 공기와 좋은 물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따뜻한 공기는 식물이 성장하여 잘 번식하게 하고, 습기는 나무의 뿌리를 튼튼하게 하여 여름철 더위를 견뎌내는 힘을 주는 것이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3년 1월호]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14) 예리코 2
■ 신약성경의 예리코
신약성경 시대의 예리코는 구약 시대의 예리코인 텔 에스-술탄(Tel es-Sultan)에서 남서쪽에 위치하였다. 헤로데 대왕(기원전 37-4년)은 와디 킬트(Wadi Qilt) 양쪽에 하스모네아 왕가의 별장을 개조하여 궁전을 지었는데, 이곳이 툴룰 아부 엘 알라이크(Tulul Abu el-Alaiq)이다. 이 헤로데 궁전 남서쪽에는 요새가 있었는데 이것은 그의 어머니 이름을 따라 키프로스(Kypros) 요새라 불렀다. 그리고 헤로데는 텔 에스-술탄의 남서쪽에 있는 텔 에스-삼라트(Tel es-Samrat)에 경마장과 반원형 극장을 건설하였다. 예수님 당시의 예리코는 텔 에스-삼라트와 툴룰 아부 엘 알라이크 부근에 위치하였을 것이다.
① 예리코의 눈먼 이
신약성경의 복음서에는 예리코가 여러 번 등장한다. 마르 10,46-52(=마태 20,29-34; 루카 18,35-43)는 예수님이 예리코의 눈먼 이(들)을 만나 치유하신 이야기를 전한다. “그들은 예리코에 들어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46-47절) 갈릴래아에서 출발한 예수님의 일행은 요르단 계곡으로부터 유다 광야를 통과하시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일행이 예리코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벌써 예루살렘 가까이에 왔다는 것을 말한다. 예리코는 사해의 북서쪽에 위치해 있었고, 유다 광야의 입구에 해당하는 중요한 도시였다. 그런데 마르 10,46에 따르면, 예수님의 일행은 예리코에 도착한 즉시 떠난다. 이것은 그들이 도착과 출발 사이에 가던 길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과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의 길을 재촉하고 계신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때 새로운 등장인물인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소개되는데, 그는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친다. 당시 유다이즘에서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호칭이다. 따라서 예리코의 눈먼 이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것이다. 이에 예수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2절)고 말씀하시자 눈먼 이는 다시 보게 되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그분의 뒤를 따랐다.
② 예리코의 자캐오
루카 19,1-10에는 예수님과 자캐오가 만난 이야기가 서술된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1-4절)
이 본문에서 소개되는 자캐오는 예리코의 세관장이고 부자였다. 그는 세관장이라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가졌지만, 유다인들의 공동체에서는 주변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웠지만, 유다인들에게는 부정(不淨)한 인물로 취급받는 모순 속에 살고 있었다. 자캐오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려고 한다. 그러나 군중에 가리고 또 그의 키가 작아서 자캐오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간다. 나무 위에 올라가면 예수님을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돌무화과나무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5절)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들은 자캐오는 그분을 “기쁘게 맞아 들였다.”(6절) 현재의 예리코 시가지에서 텔 에스-술탄으로 가는 길에는 자캐오가 올라갔다고 전해지는 돌무화과나무가 있다.
③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예수님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라고 묻는 율법 교사에게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30-37)를 말씀하신다. 비유에서 소개되는 이야기의 배경은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는 길이다. 이 길에서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는 상황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서도 그냥 지나가 버렸다. 왜냐하면 초주검 당한 이가 죽어 있기라도 했다면 부정한 것과 결코 접촉해서는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카 10,33에서 사마리아인은 초주검 당한 이를 보고서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를 끝까지 돌보아 준다. 사제와 레위인으로 대표되는 유다인들이 분리와 배제의 에토스를 따랐다면, 착한 사마리아인은 정결과 부정의 경계,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의 경계를 허물고 그것을 뛰어 넘는다. 예수님은 “함께 아파하기(compassion)”의 에토스를 실천하도록 초대하시며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고 말씀하신다.
④ 예수님의 유혹 이야기
예수님은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마르 1,9; 마태 3,5-17; 루카 3,15-22) 후,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다.(마르 1,12-13; 마태 4,1-11; 루카 4,1-13)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분께서는 40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1-4) 그리고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태 4,8-11)
복음서 본문에는 예수님이 유혹을 받으신 곳이 어디인지에 대하여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통적으로는 예수님이 40일 단식하신 후에 악마의 유혹을 받으신 높은 산을 텔 에스-술탄의 서쪽에 위치한 제벨 쿠룬툴(Jebel Quruntul)로 여겼다. 유혹의 산(Mount of Temptation)이라 불리는 이곳에는 1874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904년에 완성된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이 있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3년 2월호]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15) 스켐
스켐은 오늘날 많은 성지 순례자들이 찾는 곳은 아니지만 성경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들 중의 하나이다. 스켐은 아브라함 시대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여러 성경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
■ 위치와 지형
사마리아 지방의 스켐은 예루살렘에서 나자렛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다. 남쪽의 해발 880m 그리짐 산(Mount Gerazim)과 북쪽의 해발 940m 에발 산(Mount Ebal) 사이의 평지에 자리한 스켐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65km 떨어져 있다. 스켐은 ‘목덜미’라는 뜻으로 그리짐 산과 에발 산을 양쪽 어깨에 메고 있는 듯하다는 의미이다. 스켐 주변의 이 두 산은 신명 11,29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된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려는 땅으로 너희를 데려가시면, 그리짐 산 위에서는 축복을, 에발 산 위에서는 저주를 선언해야 한다.” 일찍이 스켐은 이집트에서 시리아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통하고 팔레스티나를 관통하는 교통의 중심지, 전략적 요충지였다. 정치적인 결정에 의해 예루살렘이 수도가 되었지만 스켐은 “팔레스티나의 왕관 없는 여왕”으로 불리며 산악 지대의 자연적인 수도로 여겨진다.
■ 구약성경의 스켐
스켐은 가나안의 주요 도시들 중의 하나였는데, 하란에서 온 아브라함은 여기에 제단을 쌓았다. “아브람은 아내 사라이와 조카 롯과, 자기가 모은 재물과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길을 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아브람은 그 땅을 가로질러 스켐의 성소 곧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이 살고 있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을 위하여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창세 12,6-7)
창세 33,18-20에서 야곱은 스켐에서 땅을 사고 제단을 세웠다. “야곱은 파딴 아람을 떠나 가나안 땅에 있는 스켐 성읍에 무사히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천막을 쳤다. 그리고 자기가 천막을 친 땅을 스켐의 아버지 하모르의 아들들에게서 돈 백 닢을 주고 샀다. 그는 그곳에 제단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 하였다.” 그리고 창세 34,1-31에 따르면 야곱의 딸 디나가 스켐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는데, 그녀의 오빠인 시메온과 레위가 스켐인들에게 복수를 하였다.
스켐은 여호수아 시대에 에프라엠 지파와 마나쎄 지파 사이의 경계가 되었다. “므나쎄의 경계는 아세르에서 출발하여 스켐 맞은 쪽에 있는 미크므탓에 다다라, 다시 남쪽으로 엔 타푸아 주민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간다.”(여호 17,7) 그리고 요셉의 뼈는 이집트에서 스켐으로 옮겨져 매장되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집트에서 가지고 올라온 요셉의 유골을 스켐에, 야곱이 스켐의 아버지 하모르의 아들들에게 돈 백 닢을 주고 산 밭에 묻었다. 그곳은 요셉 자손들의 상속 재산이 된 곳이다.”(여호 24,32) 판관 9,1-6에는 여루빠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스켐을 통치하게 된다. 한편 1열왕 12,1에서 온 이스라엘이 스켐에 모여 르하브암을 임금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결국 르하브암과 북쪽 지파들의 갈등으로 기원전 928년의 내전 이후 예로보암은 스켐을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다.(1열왕 12,25) 기원전 722년에 북 왕국이 함락된 이후 아시리아인들은 이방인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그래서 혼합족인 사마리아인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그리짐 산 정상에 제단을 쌓았다. 사마리아인들의 지도자인 산발랏(Sanballat)은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방해하였다.(느헤 4,1-9)
■ 신약성경의 스켐
요한 4장에는 유다에서 갈릴래아로 가시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대화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게 하여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5-6절) 이 장면의 배경은 분명히 스켐이다. 구약성경에는 언급이 없고 요한 4,6에 소개되는 야곱의 우물은 오늘날 텔 발라타(Tel Balata)에서 남동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 있다. 초대 그리스도교의 선교 역사에서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에 복음을 선포하였고 베드로와 요한이 그 뒤를 따랐다.(사도 8,4-25)
■ 고고학과 역사
스켐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은 1913년에 시작되었고, 1926-28년과 1932-34년에, 그리고 1956-57년과 1962-68년에 계속되었다. 고고학적 발굴은 스켐에서 기원전 4천년기 점령의 흔적을 발견하였다. 인상적인 폐허는 힉소스 (Hyksos) 시대의 것이다. 넓은 성전과 큰 도시의 성문들이 힉소스인들에 의해 세워졌는데, 기원전 1550년경에 이집트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집트 점령 이후 도시의 규모는 축소되었다. 예로보암 1세가 재건을 계획했던 시기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폐허들도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스켐을 군사 기지로 만들었다. 하스모네아 가문의 요한 히르카누스(John Hyrcanus)는 기원전 128년에 사마리아인의 성전을 파괴하였는데, 이 때 불태워진 성전의 흔적이 발굴되었다. 그 후 스켐은 하찮은 마을이 되었다. 스켐의 북쪽 언덕 위에 세바스티아(Sebastia)를 건설한 헤로데 대왕(Herod the Great)은 그곳에서 마리암(Mariamme)과 결혼하였으며 이 도시를 명승지로 만들었다. 헤로데의 도시인 세바스티아에는 부분적으로만 고고학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특히 이 도시로 들어가는 기둥들로 이루어진 긴 입구가 인상적인 발굴이다. 기원후 72년에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의 명령으로 에발 산과 그리짐 산 사이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는 이 도시를 새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 네아폴리스(Neapolis)라고 불렀다. 이 이름에서 오늘날 존재하는 도시인 나블루스(Nablus)의 명칭이 유래하였다.
야곱의 우물에 있는 기념 성당은 오랜 역사를 가진다. 비잔틴 시대에는 이 지역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다. 기원후 380년에 십자가 모양의 성당이 세워졌다. 이 성당의 여러 지하 경당들 중에는 세례대도 발견되었다. 이 성당은 484년 혹은 529년 사마리아인들의 반란 때 파괴되었다. 그 후 성당은 재건되어 9세기까지 존재했다. 그러나 초기 아랍 시대에 파괴된 성당을 십자군 시대에 다시 세웠다. 1860년에 그리스 정교회는 이 지역을 매입하였고 야곱의 우물이 있는 지하 경당을 1893년에 복원하였다. 십자군 시대의 건물 위치와 규모를 따르는 기념 성당의 재건축은 1914년에 시작되었으나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3년 3월호]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16) 베타니아
신약성경에 따르면, 베타니아는 예수님의 친구들인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가 살았던 마을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죽은 라자로를 예수님이 다시 살리신 일(요한 11,1-54)로도 유명하다.
■ 위치와 지형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의 올리브 산 근처의 벳파게와 인접한 곳이다. 이것은 마르 11,1의 언급과 일치한다. 곧 예수님은 “예루살렘 곧 올리브 산 근처 벳파게와 베타니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제자들로 하여금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도록 말씀하신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2.7km 떨어져 있는데, 올리브 산을 넘어 예리코로 내려가는 길 위에 위치한다. 이 위치는 요한 11,18에서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열다섯 스타디온쯤 되는 가까운 곳”이라고 소개한 것과도 부합한다.
베타니아(Bethany)는 본디 라자로의 무덤을 중심으로 생겨난 마을인데 오늘날에도 “라자로의 고장”이라는 의미를 가진 아랍어 엘-아자리에(El-Azariyeh)라고 불린다. 이 아랍어 명칭은 같은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 라자리온(Lazarion), 라틴어 라자리움(Lazarium)과 관련된다. 라자리온이라는 명칭은 330년경의 에우세비우스(Eusebius)뿐 아니라 그 이후의 비잔틴 시대와 중세 시대의 순례자들에게도 알려져 있었다. 베타니아가 라자로의 무덤을 중심으로 형성된 방식은 헤브론(Hebron)의 경우와 유사하다. 헤브론은 이스라엘의 성조들인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부부의 무덤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어원적으로 베타니아는 히브리어로 베트-아니(Bet ani, 가난한 이의 집) 혹은 베트 아나니야(Bet ananya, 아나니야의 집)에서 유래하였다.
■ 구약성경의 베타니아
느헤 11,32에는 바빌론 유배 이후에 벤야민의 자손들이 살았던 마을들 중에 “아나톳, 놉, 아난야”가 소개된다. 이 중 아난야(Ananyah)는 현재의 베타니아 보다 조금 더 언덕 위에 위치하였다. 1949-1953년에 있었던 고고학적 탐사 결과 아난야의 흔적이 발굴되었는데, 이곳에는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후 14세기까지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 신약성경의 베타니아
루카 10,38-42에 따르면, 예수님이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을 때 마르타라는 여자가 그분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으나, 그녀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이에 예수님은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42절)
마르타와 마리아는 라자로와 함께 요한 11,1 이하에서도 소개된다. “어떤 이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베타니아 마을의 라자로였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린 여자인데, 그의 오빠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베타니아에 가신 것은 라자로가 죽은 후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 지나 뒤였다. 예수님이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라고 큰 소리로 외치시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44절)
그리고 요한 12,1-8에 따르면, 예수님이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이 베타니아는 예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던 곳(1절)으로 소개된다. 그곳에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2절) 그때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려서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3절)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마르 14,3-9와 마태 26,6-13에도 소개된다. 마르 14,3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의 일이다. 마침 식탁에 앉아 계시는데, 어떤 여자가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 마태 26,6-7에도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떤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다가와, 식탁에 앉아 계시는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라고 기록한다.
그리고 루카 복음서는 베타니아를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으로 소개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루카 24,50)
한편 요한 복음서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베타니아와는 다른 베타니아가 언급된다. 이곳은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요한 1,28)로 소개된다.
■ 중요 순례 장소
① 라자로 성당
성 예로니모는 390년에 베타니아에 있었던 성당의 존재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이 첫 번째 성당은 지진으로 인해 파괴되었는데, 이 성당 터 위에 기원후 6세기의 두 번째 성당이 세워졌다. 두 번째 성당은 첫 번째와 같은 너비를 가졌으나 동쪽으로 반원형 부분이 13m 이동되었다. 이것은 더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는 증거인데, 첫 번째 성당을 알고 있던 에제리아(Egeria)가 384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라자리움 자체뿐 아니라 온 주변 들판을 가득 채웠다.”고 기록한 바 있다.
오늘날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라자로 성당은 성지에 많은 성당을 건축한 이탈리아의 유명한 건축가 바를루치(Barluzzi)에 의해서 1954년에 세워졌다. 기념 성당 안에는 무덤에서 나오는 라자로의 모습,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리아와 마르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여인의 모습이 모자이크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4세기와 6세기 성당의 유적이 현재 성당 뜰과 성당 안의 모자이크 바닥에서 발견된다.
② 라자로의 무덤
라자로 성당에서 북쪽으로 약 20m 떨어진 곳에 라자로의 무덤이 있다. 14세기 말에 라자로 무덤의 입구에 이슬람 사원이 세워졌다. 그래서 그 후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1566년과 1575년 사이에 현재의 입구를 만들었다. 입구를 통해 27개의 계단을 내려가면 바위를 깎아 만든 라자로의 무덤을 만날 수 있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3년 4월호]<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17) 티베리아스
티베리아스(Tiberias)는 헤로데 대왕(기원전 37-4년)의 아들인 헤로데 안티파스(기원전 4년 - 기원후 39년)에 의해 세워진 도시이다. 신약성경에서 갈릴래아 호수는 이 도시의 이름을 따라 티베리아스 호수라고도 불린다.
■ 위치와 지형
티베리아스는 갈릴래아 호수의 남서안에 위치한 큰 도시이다. 고대의 티베리아스는 현대 도시의 남쪽, 즉 함마트 티베리아스(Hammat Tiberias)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티베리아스의 동쪽 경계는 갈릴래아 호수이고, 서쪽 경계는 베레니케 산(Mount Berenice)인데, 이 산의 명칭은 아그리파 2세의 여동생 이름에서 유래한다. 티베리아스는 나자렛에서 북동쪽으로 약 30km, 타브가에서 남쪽으로 약 12km, 막달라에서 남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그리고 티베리아스는 해수면보다 207m 낮은 지점에 있다. 티베리아스라는 명칭은 헤로데 안티파스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기원후 14-37년)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
구약성경에서는 티베리아스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도시는 기원후 18년경에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티베리아스를 세운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례자 요한을 참수한 인물이다. 신약성경에서 이 도시는 요한 6,23에 언급된다. “이튿날,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군중은, 그곳에 배가 한 척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를 타고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티베리아스에서 배 몇 척이, 주님께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 먹이신 곳에 가까이 와 닿았다.” 그리고 티베리아스 호수라는 명칭은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의 시작인 요한 6,1(“그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과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야기의 시작인 요한 21,1(“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에서 언급된다.
■ 티베리아스의 역사와 전설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는 갈릴래아의 수도를 세포리스(Sepphoris)에서 티베리아스로 옮겼다. 그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재능 있는 통치자요 정치가로 역사가에 의해 평가되기도 한다. 요세푸스의 문헌에 따르면, 헤로데 안티파스는 티베리아스에 다양한 공공건물들, 즉 경기장, 궁전, 회당 등을 건설하였다. 궁전은 황금 지붕을 가지고 있었고(『생애』 66), 회당은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건물이었다.(『생애』 277) 헤로데 안티파스의 후계자 아그리파 1세(37-44년)가 죽은 후 티베리아스는 유다의 로마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61년에 네로 황제는 이 도시를 아그리파 2세(53-100년)에게 주었는데 그의 수도는 카이사리아 필리피였다.(『생애』 38) 제1차 유다 항쟁(66-70년) 동안 티베리아스의 귀족들은 아그리파 2세와 로마인들을 지지하였다. 이 시기에 요세푸스는 티베리아스를 요새화하였다.(『유다 전쟁사』 2권 572-573) 그리고 제2차 유다 항쟁(132-136년) 이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117-138년)은 이 도시를 이방인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런데 기원후 2세기 중엽에 라삐 시메온 바르 요카이(Rabbi Simeon Bar Yochai)는 티베리아스를 정화하였다. 그 후 이 도시에는 세포리스에 있던 여러 유다인들의 제도와 기관들이 옮겨졌고, 유다인들의 종교와 학문의 중심지가 된다.
미쉬나를 편찬한 라삐 유다 하-나시(Judah ha-Nasi, 135-217년)의 제자인 요하난 벤 납파하(Johanan ben Nappaha, 180-279년)는 220년 경에 티베리아스에 라삐 학교를 세웠다. 이 도시에서 미쉬나, 예루살렘 탈무드와 다른 라삐 문헌들이 완성되었다. 산헤드린의 마지막 모임이 이곳에서 개최되었고 그 뒤를 잇는 유다인 학술원인 에쉬바(Yeshiva)가 생겨났다. 특히 8세기에서 10세기에는 벤 아쉐르(Ben Asher) 가문이 자음으로 된 히브리어 구약성경에 모음 부호를 첨가하는 작업을 하였다.
티베리아스에는 유명한 라삐들이 많이 묻혔다. 엘하데프(Elhadeff) 거리와 학캄 라삐(Hakkam Rabbi) 거리 사이에, 즉 현 시내 중심가에서 걸어서 멀지 않은 위치에 그들의 무덤들이 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두 사람은 라삐 요하난 벤 자카이(Yohanan ben Zakkai)와 모세 벤 마이몬(Moses ben Maimon)이다. 전자는 얌니아(Jamnia) 혹은 야브네(Javneh)에 첫 라삐 학교를 세웠고, 후자는 12세기의 가장 유명한 유다인 현자이다. 이들의 무덤보다 더 언덕 위에 흰 지붕 아래에는 라삐 아키바(Rabbi Akiba)의 무덤이 있다. 탈무드에 따르면, 그는 제2차 유다 항쟁 당시 시몬 바르 코크바(Simon Bar Kokba)를 메시아로 선언하였으나, 결국 로마인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티베리아스의 남쪽에 있었던 함마트 티베리아스의 폐허에는 온천이 유명하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 온천은 1세기에도 사용되었다.(『생애』 85) 이 온천에는 온도가 140도가 되는 뜨거운 물이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그리고 티베리아스에는 모자이크를 가진 기원후 4세기의 회당도 방문해 볼 만한 곳이다.
두 번째 전설은 왜 함마트 티베리아스의 물은 뜨거울까에 대하여 설명한다. 다윗의 아들인 유명한 솔로몬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 중에 가장 지혜로운 이로 찬양받는다. 중세 이전의 유다인 민간전승에 따르면, 『솔로몬의 유언집』에도 기록된 대로, 솔로몬은 성전을 세우고 병자를 치유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악령을 통제하였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악령의 무리에게 명령하여 함마트 티베리아스에서 샘솟는 물을 가열시켰다. 악령들이 그들의 일을 시작했을 때 솔로몬은 그들을 귀먹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솔로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고 계속 물을 가열시켰다는 것이다. 그들은 솔로몬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3년 5월호]
세포리스(Sepphoris)는 신약성경에 전혀 언급이 되지 않는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왜냐하면 이곳이 예수님 당시 갈릴래아의 중요한 도시였고, 그분이 사셨던 나자렛과 매우 가까웠기 때문이다. 과연 몇몇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역사적 예수님은 헬레니즘적 도시인 세포리스를 잘 알고 계셨는데, 그 도시의 언어와 문화는 그분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까?
■ 위치와 지형
세포리스는 벳 네토파 계곡(Beth Netofa valley)의 남쪽과 그 위에, 그리고 나자렛에서 북서쪽으로 약 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 도시에는 지중해 해변의 프톨레마이스(Ptolemais)와 갈릴래아 호수의 남서안에 위치한 티베리아스(Tiberias)를 연결하는 길이 지나고 있어 군사적이고 경제적인 요충지였다. 세포리스 혹은 치포리(Zippori)라는 이름은 새(bird)를 의미하는데, 이 도시가 마치 횃대에 앉은 새처럼 산등성이 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 설명은 바빌로니아 탈무드에 따른 것이다.
■ 세포리스의 역사
요세푸스에 따르면, 알렉산더 얀네우스(기원전 103-76년)가 권력을 잡은 기원전 103년에 키프로스를 다스리던 프톨레마이오스 라티루스가 안식일에 세포리스를 차지하려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유다 고대사』 13권 338) 당시 세포리스는 갈릴래아의 도시들 가운데 유일하게 견고하게 요새화된 도시였다. 기원전 63년에 폼페이우스가 팔레스티나를 점령한 이후, 시리아의 로마 총독 가비누스(Gabinus)는 기원전 55년경에 세포리스를 갈릴래아 지방의 중심 도시로 만들었다.(『유다 고대사』 14권 9) 기원전 37년경에 헤로데 대왕(기원전 37-4년)은 세포리스를 쉽게 차지하였는데, 왜냐하면 “하느님이 눈을 보내셨기” 때문이다.(『유다 고대사』 14권 9; ) 사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헤로데 대왕은 겨울에 눈보라가 치는 가운데 세포리스를 점령하였다. 헤로데 대왕은 세포리스에 궁전을 세웠다.
기원전 4년에 헤로데 대왕이 죽은 이후, 그의 세 아들들인 아르켈라우스(Archelaus), 헤로데 안티파스(Herod Antipas), 필립포스(Philip)가 여러 지역을 나누어 다스렸다. 갈릴래아의 영주는 헤로데 안티파스(기원전 4년-기원후 39년)였다. 기원전 4년에 에제키아스(Ezekias)의 아들 유다(Judas)는 세포리스의 궁전을 공격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유다는 사도 5,37의 “그 뒤 호적 등록을 할 때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서서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라는 기록에서 소개된 인물이다. 시리아의 로마 총독 바루스(Varus)는 자신의 아들을 군대와 함께 갈릴래아로 보내었다. 바루스의 아들은 유다를 처벌하였고, 세포리스를 불태웠으며 그곳의 주민을 노예로 만들었다.(『유다 고대사』 17권 289) 다른 지역에서도 유다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바루스가 직접 팔레스티나로 와서 진압하고 약 2000명을 십자가형에 처하였다.(『유다 고대사』 17권 295)
헤로데 안티파스는 세포리스 도시를 재건축하였으며 요새화하였다. 그는 세포리스를 갈릴래아의 수도로 삼았으며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아우토크라토리스(Autocratoris)라고도 불렀다.(『유다 고대사』 18권 27) 요세푸스는 자신의 문헌들에서 세포리스를 다양하게 묘사한다. 그는 세포리스를 “갈릴래아에서 가장 강한 도시”(『유다 전쟁사』 2권 511)라고 표현한다. 그는 세포리스와 관련하여, 헤로데 안티파스가 “세포리스 부근의 성벽을 쌓았고”, “나라의 중심도시로 삼았다.”(『유다 전쟁사』 18권 27)고 기록한다. 그리고 이 도시를 “온 갈릴래아의 장신구”(the ornament of all Galilee, 『유다 고대사』 18권 27)라고 표현한다.
세포리스는 제1차 유다 항쟁(66-70년) 동안 유다인들의 저항 운동에 반대하여 로마 제국의 편에 서게 되었다. 기원후 70년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세포리스는 유다 교육과 최고 의회(Sanhedrin)의 중심지가 되었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는 세포리스를 도시(polis)로 승격시켰다. 제2차 유다 항쟁(132-136년) 이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는 세포리스를 디오체사레아(Diocaesarea)로 불렀는데, 이 명칭은 “제우스(Zeus)와 체사르(Caesar)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다.
■ 고고학적 발굴
여러 차례(1908년, 1931년, 1980년대)에 걸친 고고학적 발굴은 세포리스에서 다양한 유적을 발견하였다. 로마 시대의 반원형 야외 극장은 약 4000-5000명을 수용할 정도의 큰 규모이다. 이 야외 극장의 건축 시기에 대하여 고고학자들의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었다. 기원후 1세기 초반을 주장하기도 하고 기원후 2세기를 주장하기도 한다. 세포리스에서는 십자군 시대의 요새가 발견되었다. 이 요새 근처에는 기원후 3세기 로마 시대의 대저택이 발견되었다. 이곳의 연회장(triclinium) 바닥에는 돌로 만든 모자이크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특히 디오니소스(Dionysos) 제의와 관련이 되는데, 그중에서 매우 아름다운 여인의 모자이크를 학자들은 “갈릴래아의 모나리자(Mona Lisa of Galilee)”라고 부른다. 그리고 기원후 6세기의 유다교 회당이 발견되었는데, 일곱 모자이크가 인상적이다.
■ 역사적 예수와 세포리스
몇몇 학자들은 역사적 예수가 세포리스를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 도시의 건설에 참여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헬레니즘적 도시인 세포리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분의 말씀 중 “위선자(hypocrites)”라는 표현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사실 이 표현은 극장의 배우를 가리키는데, 이것을 예수님은 극장이 있던 세포리스에서 배웠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실 마르 6,3에서 “목수”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테크톤(tekton)은 단지 나무를 다루는 목수뿐 아니라 돌을 다루기도 하고 다른 기술도 가진 넓은 의미의 기술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요셉이나 예수님이 나자렛에서 가까운 세포리스에서 기술자로서 일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대로 학자들 사이에는 세포리스에서 발견된 야외 극장의 건설 시기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있다. 비록 헤로데 안티파스에 의해 작은 규모이나마 야외 극장이 건설되었다 하더라도 그 시기에 요셉이나 예수님이 그 건설 현장에서 일하셨을 가능성은 여전히 가능성만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 헬레니즘적 도시와 그 문화가 예수님의 생애와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매우 과장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의 “위선자”(마태 23,23.25.27.29)라는 표현이 세포리스의 언어와 문화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3년 6월호]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19) 예루살렘의 지리와 역사
■ 예루살렘의 역사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구석기 시대의 거주지가 발견되었다. 예루살렘은 기원전 19세기의 이집트 문헌에 언급된다. 여호 10장에 따르면 여호수아는 아모리족의 다섯 임금을 처형하였는데, 이들 중에는 예루살렘 임금 아도니 체덱이 있었다.
창세 14,17-20은 크도를라오메르에게서 승리를 거둔 후 아브람이 소돔의 임금과 멜키체덱을 만난 이야기이다. 여기서 멜키체덱은 살렘의 임금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로 소개된다. 멜키체덱은 아브람에게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왔고 그를 축복하고, 하늘과 땅의 창조자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찬미한다. 그리고 아브람은 멜키체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 사실 고대 근동에서는 임금들이 사제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후대 전승에 따르면 창세기 본문의 살렘은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창세 22장에서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모리야 땅에 있는 어떤 산으로 간다. 2역대 3,1에 따르면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곳은 “모리야 산”이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마련하신 숫양을 번제물로 바치고 그곳의 이름을 “야훼 이레”(창세 22,14)라 하였다.
기원전 1000년경 다윗은 여부스족이 차지하고 있던 시온 산성, 곧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다윗 성이라 하였다.(2사무 5,6-10) 예루살렘은 유다 지파의 영역 안에 있어서 다윗 왕조의 정치적 안정을 이루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다윗은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김으로써 왕조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윗은 판관 시대 말에 필리스티아인들에 빼앗겼다 되돌려 받은 계약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정치적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 중심지라는 것을 보여준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고 그곳에 계약 궤를 모셨다.(1열왕 8,1-30) 이것은 다윗이 시도했던 종교적 수도로서의 예루살렘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솔로몬은 궁전과 성벽 등 많은 건축물들을 지어 예루살렘이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솔로몬이 죽은 후 남 왕국과 북 왕국이 분열되었다. 남 왕국은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수도는 예루살렘이었다. 남쪽 유다 왕국은 북 왕국 멸망(기원전 722년경) 후에도 존속했다.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을 초대 임금으로 20명이 왕위를 계승하여 남쪽 유다 왕국을 지배하였다.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은 바빌론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기원전 604-562년)에 의하여 사상 유례 없는 침략의 고통을 당해야 했다. 치드키야 임금은 바빌론에 굴복하라는 예레미야의 충고에도 불구하고(예레 27-29장), 이집트를 의지하면서 바빌론에 반기를 들었다.(2열왕 25,1) 그러자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는 기원전 588년 유다 왕국을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일 년 반 동안 포위하고 함락시켰다. 바빌론은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완전히 파괴하였으며 전 유다 왕국을 황폐화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바빌론 유배는 기원 539년경까지 계속되었다. 페르시아의 키루스 임금이 바빌론을 멸망시키고, 바빌론의 포로들을 해방시키는 칙령을 발표했다. 바빌론 유배에서 귀환한 유다인들의 당면과제는 바빌론 제국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이었다.(에즈 1,1-4) 성전은 기원전 515년에 다시 세워졌는데, 이것을 제2 성전(Second Temple)이라고 부른다. 예루살렘의 성전이 재건된 이후 기원후 70년 이 성전이 로마 제국에 의해 파괴되기까지의 기간을 제2 성전시대라고 한다.
하스모니아 왕조를 정복한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3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 이 로마 시대는 세 단계로 나뉘어지는데, 히르카누스 2세(기원전 63-40년) 하의 속국 단계, 헤로데 가문의 통치 단계(기원전 37-기원후 6년), 그리고 로마의 직접 통치 단계(기원후 6-66년) 등이 그것이다. 기원후 66-70년에는 로마 제국에 대항한 제1차 유다항쟁이 일어났는데,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다. 132-136년의 제2차 유다항쟁도 로마 제국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다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하였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3년 7월호]
오늘날 예루살렘에는 구시가(Old City)를 둘러싸고 있는 웅장한 성벽과 성문들이 있다. 현재의 성벽은 기원후 16세기에 완성된 것이다. 사실 예루살렘의 성벽은 역사 안에서 길고도 다양한 변천 과정을 거쳤다. 성벽은 시기별로 확장되기도 하였고 외세의 침략에 의해 파괴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성벽의 변천 과정에 따라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예루살렘의 성벽은 성경 안에서 다양하게 언급된다. 예루살렘과 그 성벽을 노래하는 시편의 다음 몇 구절들을 소개한다. “주님은 위대하시고/ 드높이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우리 하느님의 도성/ 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아름답게 솟아오른 그 산은/ 온 누리의 기쁨이요/ 북녘의 맨 끝 시온 산은/ 대왕님의 도읍이라네. 하느님께서 그 궁궐 안에 계시며/ 당신을 성채로 드러내신다.”(시편 48,2-4) “거룩한 산 위에 세워진 그 터전,/ 주님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성문들을 사랑하시니/ 하느님의 도성아/ 너를 두고 영광스러운 일들이 일컬어지는구나.”(시편 87,1-3) “그곳에 재판하는 왕좌가, 다윗 집안의 왕좌가 놓여 있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를 빌어라. ‘너를 사랑하는 이들은 평안하여라. 네 성안에 평화가, 네 궁궐 안에 평안이 있으리라.’”(시편 122,5-7)
다윗 임금이 수도로 삼은 “다윗 성”(2사무 5,7)은 예루살렘의 동쪽 언덕에 위치한 작은 거주지였다. 이곳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일한 샘과 가깝고 양쪽으로 깊은 두 계곡이 있었다. 다윗은 계약 궤를 이 성 안으로 옮겼고, 그의 아들 솔로몬(기원전 965-928년)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였다. 그는 도시를 확장해야 했는데, 계곡들 때문에 능선을 따라 북쪽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1열왕 9,15에 따르면, 솔로몬 임금은 주님의 집과 자기 궁전을 밀로 짓고, 예루살렘 성벽을 세웠다.
기원전 8세기 후반에 아시리아가 북 왕국을 침략했을 때 많은 피난민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와서 성 바깥 서쪽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기원전 701년 아시리아의 임금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위협하였을 때 새로운 성벽이 서쪽 언덕을 둘러싸기 위해 세워졌고 도시의 규모는 네 배로 확장되었다. 2역대 32,5에 따르면 “히즈키야는 용기를 내어 허물어진 성벽들을 모두 쌓고 탑들을 높였으며, 성 밖에 또 다른 성벽을 쌓았다.” 여기서 묘사된 이 예루살렘이 기원전 586년에 바빌론 제국에 의해 파괴되었다. 50년 가량의 유배 이후 귀환하였을 때 성벽을 다시 세우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느헤미야(기원전 445-443년)는 페르시아의 임금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의 성벽을 다시 세웠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우리는 불행에 빠져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문들은 불에 타 버렸습니다. 자,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읍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더 이상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합시다.”(느헤 2,17) 느헤미야 당시 예루살렘 주민의 수는 많이 감소하였기 때문에 성벽의 규모는 솔로몬 당시의 도시보다 훨씬 줄어 들었다.
느헤 12,27-43는 예루살렘 성벽 봉헌 당시의 상황을 전한다.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할 때, 사람들은 레위인들을 곳곳에서 찾아내어 예루살렘으로 데려왔다. 자바라와 수금과 비파에 맞추어 감사와 노래로 봉헌식을 기쁘게 올리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성가대가 모여들었는데, 예루살렘 주변 일대와 느토파인들의 촌락들, 벳 길갈, 게바와 아즈마 들판에서 왔다. 성가대는 예루살렘 주변에 촌락들을 세우고 살았던 것이다.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자신들을 정결하게 한 다음, 백성과 성문들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였다. 나는 유다의 수령들을 성벽 위로 올라오게 하고, 큰 찬양대 둘을 세운 다음, 한 찬양대를 ‘거름 문’을 향하여 성벽을 타고 오른쪽으로 행진하게 하였다…. 그날 사람들은 많은 제물들을 바치며 기뻐하였다. 하느님께서 큰 기쁨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셨기 때문이다. 여자들과 아이들도 함께 기뻐하니, 예루살렘에서 기뻐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다.” 이 본문에는 당시 예루살렘에 존재했던 거름 문, 샘 문, 다윗 성, 물 문, 가마 탑, 넓은 성벽, 에프라임 문, 옛 문, 물고기 문, 하난엘 탑, 백인 탑, 양 문, 경비대 문과 같은 다양한 지명과 명칭이 소개된다.
기원전 2세기 전반부의 마카베오 항쟁 이후 예루살렘은 다시 성장하였다. 요한 히르카누스(기원전 134-104년)와 알렉산드로스 얀네오스(기원전 103-76년)와 같은 강력한 하스모니아 왕조의 임금들은 먼저 서쪽으로, 그 다음으로는 북쪽으로 예루살렘을 확대하였다. 그런데 헤로데 대왕(기원전 37-4년)은 놀랍게도 성벽은 손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예루살렘 안의 건축물들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예루살렘 성전의 동쪽 경계가 동쪽 성벽의 역할을 하였다. 요세푸스의 『유다 전쟁사』 5권 147-155에 따르면, 헤로데 아그리파 1세(기원후 37-44년)가 새로운 북쪽 성벽의 기초를 놓았고, 제1차 유다 항쟁(기원후 66-70년) 동안에 완성되었다. 기원후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무너뜨리도록 명령한다. “로마 군대는 살인과 약탈로 분노를 발산했다. 분노의 대상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자, 티투스는 도시 전체와 성전을 파괴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장 높이 솟아 있는 세 개의 망대, 즉 파사엘, 히피쿠스, 마리암메 망대와 도시의 서쪽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만은 파괴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이곳을 나중에 예루살렘에 남을 로마 군대의 주둔지로 사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망대들은 예루살렘 도시가 얼마나 견고한 요새였는지, 그리고 이 도시를 정복한 로마 군대가 얼마나 용맹하였는지를 후손들에게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로마 군대는 성벽들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래서 장차 이곳을 찾는 이들이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다.”(『유다 전쟁사』 7권 1-2) 성벽의 파괴는 티투스에 의해 시작되었고, 기원후 135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사실상 완료되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새로운 이름인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에는 단지 로마 군대 제10군단의 주둔지만이 벽으로 둘러싸여져 있었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어 그곳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었다. 313년에 그리스도교가 로마 황제의 공적인 지지를 받게 되어 예루살렘은 새로운 종교적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예수님과 관련있는 장소들에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였다. 예루살렘 도시는 더욱 확대되었다. 5세기에 황제의 부인인 에우도키아(Eudokia)는 그리스도인의 시온 산과 본래의 다윗 성에 성벽을 세웠다. 637년에 예루살렘은 칼리프 오마르에 의해 점령되었다.
오늘날 예루살렘 성벽은 오스만 터키 제국의 술탄 슐레이만 2세(1520-1566년)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는 1537년에 북쪽 성벽을 세우기 시작하였고 동쪽과 서쪽으로 계속 진행하였다. 남쪽의 성벽은 1540년에 완성되었다. 사실 당시에 남쪽 성벽 안에 시온 산을 포함할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현재 예루살렘 성벽의 높이는 평균 17m이고 전체 길이는 약 4km이다. 성 안, 즉 구시가(Old City)의 전체 면적은 1km2인데, 4개의 지역으로 구분된다. 북쪽은 그리스도인 지역, 북동쪽은 이슬람인 지역, 남서쪽은 아르메니아인 지역, 그리고 남동쪽은 유다인 지역이다. 시온 산과 다윗 성은 현재의 성벽 바깥에 위치한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3년 8월호]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21) 예루살렘의 성문들 - 1
오늘날 예루살렘 구시가(Old City)의 성벽에는 닫혀있는 황금의 문(Golden Gate)을 포함하여 총 8개의 성문들이 있다. 북쪽의 가장 멋진 성문으로부터 시계 방향으로 열거하면, 다마스쿠스의 문(Damascus Gate), 헤로데의 문(Herod’s Gate), 성 스테파노의 문(St Stephen’s Gate), 황금의 문, 오물의 문(Dung Gate), 시온의 문(Sion Gate), 야포의 문(Jaffa Gate), 새 문(New Gate)이다. 기원후 16세기 술탄 슐레이만 2세에 의해 예루살렘 성벽이 완성될 당시에는 총 6개의 성문들이 존재했다. 그는 동일한 형태로 성문들을 만들었고, 모든 성문에 공식적인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그 후 성문들의 이름은 여러 언어와 종교적 공동체에 따라 다양하게 불려진다. 오늘날의 성문들 중에서 오스만 터키 제국 당시의 L자 형태 통로를 간직하고 있는 것은 다마스쿠스의 문, 헤로데의 문, 시온의 문, 야포의 문이다. 이 성문들에는 수평 혹은 약간 굽은 상인방과 아랍어 명각(inscription)이 있었다. 성문의 통로를 L자 형태로 만든 것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방어를 용이하게 한 것이다. 영국의 신탁 통치(British Mandate)하에서 헤로데의 문과 성 스테파노의 문이 직접적인 출입구가 되었다. 오물의 문은 본래 일종의 뒷문이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넓혀졌다. 1887년에 다마스쿠스의 문과 야포의 문 중간 지점에 새 문이 만들어졌다.
① 다마스쿠스의 문
다마스쿠스의 문은 예루살렘 북쪽 성벽의 중앙에 있는 것으로, 성문들 중에서 가장 정교하고 아름답다. 이 지역에 현존하는 오스만 터키 제국의 건축물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다. 다마스쿠스의 문은 성문들 중에서 유일하게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것이다. 1938~1939년과 1965~1966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곳에 성문이 처음으로 세워진 것은 헤로데 아그리파 1세(기원후 41~44년) 때의 일이다. 그 후 기원후 135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다시 세워진 성문은 독립적인 구조를 가진 기념비로 당시 예루살렘의 새 이름인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들어가는 출입구로의 역할을 하였다. 현재 다마스쿠스의 문 밑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서쪽으로는 십자군 시대의 성당을 볼 수 있고 동쪽으로는 성안으로 통하던 옛 문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마스쿠스의 문의 명칭은 히브리어로 샤아르 스켐(Sha’ar Shechem), 즉 “스켐의 문”이다. 그 이유는 이 성문이 예루살렘의 북쪽에 위치한 스켐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스켐을 거쳐 다마스쿠스 도시로 가는 길이 시작되기 때문에 이 성문의 이름이 다마스쿠스의 문이다.
그리고 아랍어로 이 성문은 바브 엘-아무드(Bab el-Amoud), 곧 “기둥의 문”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이곳에 원주형 기둥을 세웠기 때문이다. 사실 로마인들은 도로를 만들면서 거리를 측정하는 이정표를 세웠던 것이다. 기원후 6세기의 마다바 지도(Madaba Map)에는 이 기둥이 성문 바로 뒤에 위치해 있다. 로마 시대에는 이 성문에서 시온의 문까지 중심 도로, 즉 카르도 막시무스(Cardo Maximus)가 있었다.
② 헤로데의 문
이 성문은 예루살렘 북쪽 성벽의 동쪽에 위치한다. 헤로데의 문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16~17세기의 순례자들이 근처에 있던 마멜루크의 집을 헤로데 안티파스(Herod Antipas)의 궁전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 성문은 히브리어로 샤아르 하페라힘(Sha’ar Haperachim), 아랍어로 바브 에즈-자르(Bab ez-Zahr), 곧 “꽃으로 장식된 문”, “꽃의 문”으로 불린다. 그 이유는 성문에 꽃의 문양이 있었거나 성문 근처에서 상인들이 꽃을 팔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성문은 예루살렘 구시가의 북동쪽에 위치한 이슬람인 지역으로 통하기 때문에 아랍인들의 출입이 많다.
③ 성 스테파노의 문
이 성문은 예루살렘 동쪽 성벽에, 곧 올리브 산을 마주보며 위치해 있다. 이 성문을 통하여 올리브 산, 베타니아, 예리코, 요르단 강으로 갈 수 있다. 슐레이만 2세는 이 성문을 바브 엘-고르(Bab el-Ghor), 즉 “요르단의 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명칭은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이 성문이 성 스테파노의 문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사도 7,54-8,1의 스테파노 순교와 관련된다. 비잔틴 시대의 순례자들에 따르면, 6세기의 성 스테파노의 문은 북쪽에 있는 것으로써 오늘날 다마스쿠스의 문이라고 부르는 성문이었다. 그런데 1187년에 라틴 제국이 멸망한 이후 아랍인들은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이 군사적으로 가장 취약한 북쪽 성벽 근처를 통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순례자들은 올리브 산과 예리코를 방문하기 위하여 동쪽 성문을 이용해야만 했다. 비잔틴 시대와 십자군 시대에 예루살렘 북쪽에 있던 여러 중요한 장소들이 동쪽으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이 동쪽 성문을 성 스테파노의 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성문은 매우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사자의 문”이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성문 바깥쪽 벽 좌우에 사자의 부조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슐레이만 2세의 꿈에 두 마리의 사자가 나타나 성문을 다시 세우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1540년에 성문은 보수되었고 사자의 부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성문 근처에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의 집이 있다고 해서 “안나의 문”이라고도 불리고 근처에 마리아의 무덤이 있다고 해서 “마리아의 문”이라고도 불린다. 유다인들은 여호사팟 계곡으로 통하는 문이라고 해서 “여호사팟의 문”이라고도 부른다. 이 성문을 “양 문(Sheep Gate)”이라고도 한다.
④ 오물의 문
오물의 문은 예루살렘 남쪽 성벽의 동쪽에 있으며 성문들 중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다. 이 문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안의 오물들이 키드론 계곡과 티로포에온 계곡에 버려졌다. 유다인들은 이 성문을 느헤 2,13에 나오는 “거름 문”에 따라 오물의 문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나는 밤에 ‘계곡 문’으로 나가 ‘용 샘’을 지나 ‘거름 문’까지 가면서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과 불에 탄 성문들을 살펴보았다.” 이 성문은 아랍어로 바브 엘-마가르베(Bab el-Magharbeh), 곧 “무어인들의 문”이라고도 불린다. 그 이유는 16세기경에 북아프리카에서 이주한 이슬람 무어인들이 이 성문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1958년에 요르단인들은 자동차들이 통행할 수 있도록 이 성문을 넓혔다. 오늘날 많은 유다인들은 이 성문을 통하여 그들의 거룩한 장소인 통곡의 벽으로 출입한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3년 9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22) 예루살렘의 성문들 - 2
⑤ 시온의 문
시온의 문은 예루살렘 남쪽 성벽의 서쪽에 있다. 시온의 문이라는 명칭은 이 성문이 시온 산으로 가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아랍어로는 바브 나비 다우드(Bab Nabi Daud), 즉 “예언자 다윗의 문”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전설에 따르면 다윗의 무덤이 시온 산에 있기 때문이다. 시온의 문에는 많은 총알 자국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1948년에 있었던 구시가의 유다인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다. 이 성문은 1968년 6일 전쟁 이후 다시 보수되었다. 현재 예루살렘의 남서쪽에 위치한 시온 산에는 성모 승천 기념 성당, 최후 만찬 기념 성당, 베드로 회개 기념 성당 등이 있다.
⑥ 야포의 문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야포 도시로 통하는 야포의 문은 예루살렘 서쪽 성벽의 유일한 성문이다. 아랍어로는 바브 엘-칼릴(Bab el-Khalil), 즉 “친구의 문”이라고 불린다. 여기서 친구는 아브라함을 가리킨다. 사실 이사 41,8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친구로 소개된다. “그러나 너 이스라엘, 나의 종아 내가 선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후손들아!” 바브 엘-칼릴이라는 명칭은 이 성문이 아브라함의 묘지가 있는 헤브론 도시로 통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1898년에 오스만 터키 제국의 술탄 압둘 하미드 2세(Abdul Hamid II)는 L자 형태의 성문과 다윗 성 사이의 성벽을 헐었다. 이것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Kaiser Wilhelm II)가 예루살렘 성 안으로 마차를 타고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내기 위해서였다. 현재 야포의 문 옆에 개방된 길은 자동차 도로로 사용된다.
⑦ 새 문
히브리어로 샤아르 하다쉬(Sha’ar Hadash)인 새 문은 예루살렘 북쪽 성벽의 서쪽에 있다. 이 성문은 1887년에 술탄 압둘 하미드 2세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성문은 예루살렘 성벽 바깥의 북쪽 근교에 자리 잡은 거주민들에게 구시가로의 접근을 쉽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⑧ 황금의 문
예루살렘 동쪽 성벽에 위치한 황금의 문은 현재 닫혀 있다. 이 성문에 대한 전승들은 대단히 많지만 그 역사적 신빙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유다인들의 미쉬나(Mishnah)에 따르면 올리브 산 맞은 편 성전 동쪽에 “수사의 문(Shushan Gate)”이 있었는데 붉은 암소 예식(민수 19,1-10)을 위해 사용되었다. 헤로데 시대의 것인 이 옛 성문의 흔적이 현재 황금의 문 구조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이 성문은 아마도 피아첸차(Piacenza)의 순례자가 기원후 570년에 목격했던 것일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의 북쪽 문은 성전의 한 부분이었던 “아름다운 문” 옆에 있었고 그곳에 문지방과 수평부분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순례자는 황금의 문을 베드로 사도가 불구자를 치유한 “아름다운 문”과 연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또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사도 3,1-10) 사실 황금의 문은 로마 황제의 부인인 에우도키아(Eudokia)가 5세기 중반에 이 베드로의 기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존재했었다.
518년경의 테오도시우스(Theodosius)는 성지 주일에 예수님이 성전의 북쪽에 있던 “벤야민의 문(Gate of Benjamin)”, 즉 지금의 성 스테파노의 문을 통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 황금의 문은 그 형태가 후기 비잔틴 시대의 것이다. 631년에 황제 헤라클리우스(Heraclius)가 페르시아인들이 614년에 훔쳐간 십자가를 되찾았을 때 그것을 맞이하기 위해 모데스투스(Modestus)가 만들었을 가능성도 주장된다. 그런데 건축 양식과 역사적 개연성으로 보아 현재의 구조는 칼리프 아브드 알-말리크(Abd al-Malik, 685-705년)에 의해 만들어졌다. 기원전 8세기에 이슬람인들은 이 성문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왜냐하면 이 성문을 통해 이슬람교도가 아닌 이들이 이슬람교 대사원에 출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중세에는 십자군들이 일년에 두 번, 곧 성지 주일과 십자가 현양 축일에 황금의 문을 개방하였다. 황금의 문이라는 명칭은 7세기경부터 사용되었다. “아름다운”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호라이아(horaia)와 “황금의”를 뜻하는 라틴어의 아우레아(aurea)는 그 발음이 유사해서 혼동되어 포르타 아우레아(Porta aurea), 즉 황금의 문으로 불려졌다.
황금의 문은 십자군 시대 이후에 닫혀 있다. 현재 닫혀 있는 황금의 문에 대한 유다인, 그리스도인, 이슬람인들의 다양한 설명이 존재한다. 유다인들은 에제 44,1-3에 근거하여 하느님이 이미 이 성문을 지나셨기 때문에 닫혀 있다고 설명한다. “그 사람은 나를 성전 밖, 동쪽으로 난 대문으로 다시 데리고 갔는데, 그 대문은 잠겨 있었다. 그때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문은 잠가 둔 채, 열어서는 안 된다. 아무도 이 문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이곳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겨 있어야 한다. 다만 제후는 그가 제후이므로 여기에 앉아 주님 앞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그는 대문 현관 쪽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그 길로 나가야 한다.’”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올 때 이 성문이 열린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성전으로 통하는 이 성문을 지나가셨기 때문에 황금의 문은 닫혀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닫혀 있는 이 성문은 예수님이 최후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실 때 열린다고 한다. 한편 이슬람인들은 장차 의인이 마지막 심판자와 함께 이 성문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황금의 문이 두 개의 문, 곧 자비의 문과 회개의 문으로 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3년 10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23) 벳파게
신약성경의 복음서에 따르면, 올리브 산의 벳파게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던 예수님의 행렬이 시작되었던 장소이다. 우리는 벳파게에 대한 역사적, 문헌적, 고고학적인 정보들과 함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위치와 지형
벳파게(Bethphage)라는 명칭은 “무화과나무의 집” 혹은 “무화과나무의 밭”이라는 뜻이다. 오늘날 예리코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는 베타니아를 거쳐 올리브 산으로 가게 된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예리코에서 산길을 따라 올리브 산에 다다랐을 것이다. 올리브 산 정상에 있는 엣 투르(Et Tur)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든지 베타니아로 갈 수도 있다. 성경의 벳파게는 이 엣 투르와 베타니아의 중간 지점에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벳파게 기념 성당은 엣 투르에서 도보로 약 10분 정도 되는 거리에 있다.
신약성경의 벳파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는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다.(마태 21,1-11; 마르 11,1-11; 루카 19,28-38; 요한 12,12-19) 그런데 사실 이 복음서들의 언급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마르 11,1(“그들이 예루살렘 곧 올리브 산 근처 벳파게와 베타니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와 루카 19,29(“올리브 산이라고 불리는 곳 근처 벳파게와 베타니아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는 벳파게와 베타니아가 함께 등장한다. 그러나 마태 21,1(“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러 올리브 산 벳파게에 다다랐을 때”)에는 벳파게만이 언급된다.
예수님은 제자 둘을 보내며 말씀하셨다. “너희 맞은쪽 동네로 가거라. 그곳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오너라.”(마르 11,2)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예수님의 이 모습은 즈카 9,9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의 말씀과 관련 있다. 마태 21,4-5에는 이 구약성경과의 관계가 명시적으로 표현된다.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일이 일어난 것이다.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평화를 가져오는 겸손한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즈카 9,10은 다음과 같이 예언한다. “그분은 에프라임에서 병거를,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시고 전쟁에서 쓰는 활을 꺾으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그분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 요한 12,14-16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올라앉으셨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였다. ‘딸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오신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뒤에, 이 일이 예수님을 두고 성경에 기록되고 또 사람들이 그분께 그대로 해 드렸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수많은 군중이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태 21,9)라고 외쳤다. 요한 12,12-13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이튿날, 축제를 지내러 온 많은 군중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서,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 이렇게 외쳤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이스라엘의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이 군중의 외침에서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에 대한 대중의 대망이 표현된다. 예수님은 임금이신 메시아로서 다윗의 도시인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
기원후 384년에 에제리아(Egeria)는 벳파게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예루살렘에서 오는 길에 라자리움(Lazarium), 곧 베타니아로부터 약 800m 가량 떨어진 곳에서 길 가에 위치한 성당 하나를 발견한다. 그곳은 라자로의 여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났던 곳이다.” 이 기록은 벳파게와 요한 11,1-54의 라자로 이야기와의 관련성을 제시한다. 즉 베타니아로 가시던 예수님을 마르타와 마리아가 맞으러 와서 만난 곳이 벳파게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되는 구절은 요한 11,20(“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과 11,32(“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이다. 한편 마르 11,1-11에 따르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곳의 모든 것을 둘러보신 다음,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타니아로 나가셨다.” 바로 뒤이어 나오는 마르 11,12는 “이튿날 그들이 베타니아에서 나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장하셨다.”라고 언급한다. 마르 11,12-14은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야기이고 마르 11,20-25는 그것에 대한 설명이다. 그래서 이 무화과나무와 관련된 이야기를 벳파게와 연결 짓는 주장이 있다. 이것은 벳파게라는 명칭이 무화과나무와 관련된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벳파게 기념 성당
현재의 벳파게 기념 성당은 중세 시대의 옛 성당의 폐허 위에 1883년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의해 세워졌다. 기념 성당에는 예수님과 마르타, 마리아의 만남, 라자로의 부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등의 장면이 그려져 있다. 성당의 제단 근처에는 가로 1.3m, 세로 1.1m, 높이 1m의 돌이 있다. 중세 시대의 옛 성당은 이 돌을 안치하기 위해 세워졌다. 십자군들은 이 돌을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 당시 어린 나귀에 오르기 위해 발을 디뎠던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들은 팔레스타인의 어린 나귀가 그들이 전쟁터에서 탔던 말과 같은 크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 돌의 정확한 의미는 불확실하다. 이 돌에는 예수님이 라자로의 두 여동생을 만난 장면(요한 11,20-30)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1950년에 손상 없이 복원되었다.
기념 성당 뒤편의 프란치스코 수도회 구역에서 우리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8세기까지 이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다양한 증거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여러 물 저장소들, 구르는 돌로 닫힌 무덤들, 모자이크로 장식된 포도즙을 짜는 틀 등이 있다.
성지 주일의 행렬
오늘날 매년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장엄한 행렬이 이루어진다. 이 행렬은 벳파게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 구시가(Old City)의 성 안나 성당(Church of Saint Anne)에 이르기까지 진행된다. 예루살렘 총대주교와 함께 전 세계에서 온 많은 순례자들이 이 행렬에 참여한다.
[월간빛, 2013년 11월호, 예수님과 로마 제국
역사적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시대는 로마 제국이 통치하던 세계였다. 사실 오늘의 그리스도인 독자들은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로마 제국에 대한 이해 없이 예수님과 신약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로마 제국은 신약성경의 사건, 인물, 표현 방식, 언어 등을 위한 중요한 정치, 경제, 사회, 종교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
■ 로마 제국의 구조
예수님 당시의 기원후 1세기 로마 제국은 지중해 주변의 여러 지역과 민족들을 지배하였다. 오늘날의 명칭으로 표현하자면, 당시의 로마 제국은 북서쪽의 영국으로부터, 서쪽의 프랑스와 스페인을 거쳐 유럽을 가로질러 동쪽으로는 터키와 시리아, 남쪽으로는 북 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로마는 당시 6000-6500만 명의 다양한 종족과 문화의 주민들을 지배하였다. 로마 제국은 기본적으로 위계질서적인 계급 사회였으며, 권력과 부는 본질적으로 불평등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소수의 지배 엘리트들의 삶은 매우 안락했으나, 그들을 제외한 다수의 민중은 겨우 생존을 유지하며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사회 안에서 중간 계층은 존재하지 않았고, 곤경에 처할 경우 사회적 안전망은 매우 부족하였다.
로마 제국은 귀족의 제국이었다. 즉 로마 제국은 귀족주의적 정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전체 주민의 2-3퍼센트에 불과한 소수의 지배 엘리트들이 제국을 지배하였다. 그들은 공동선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중요한 정치적 직책을 차지하였다. 그래서 지배 엘리트들은 권력을 행사하고 부를 장악하였으며 높은 지위를 향유하였다. 그들은 제국의 거주민들의 사회적 경험을 형성하였고 삶의 질을 결정하였다.
■ 로마 제국의 통치
로마 황제는 지배 엘리트들과의 협력적인 관계 안에서 로마 제국을 통치하였다. 이것은 제국의 중앙에서뿐 아니라 지방의 도시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팔레스티나의 경우 로마 제국은 헤로데 대왕과 같은 피보호자들과 동맹의 관계를 맺었다. 그래서 헤로데 가문은 로마의 승인 하에 통치할 수 있었고 로마의 이익을 증진시켰다. 이와 같이 로마 제국은 후원자-피보호자의 관계(patron-client relation)로 이루어졌다. 지배 엘리트들은 이 후원자-피보호자의 관계를 통하여 그들의 부와 권력을 증진시켰다. 그들은 지배자의 지위를 강화하고 일반 민중의 순종과 복종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이 후원자-피보호자의 종속적 관계를 확대시켰다. 권력과 지위를 위한 지배 엘리트들의 경쟁은 시민 생활에서의 다양한 지도력의 행사 안에서 그들의 부와 영향력을 과시하도록 만들었다.
로마 제국의 지배 엘리트들은 그들이 가진 힘으로 다른 민족들을 복종시키고 자원을 착취할 수 있다고 여겼다. 제국의 질서에 저항한 민족들은 위협적인 군사적 폭력에 의해 탄압받았다. 제국의 점령은 마을들을 황폐화시켰고 가족들을 붕괴시켰으며 생존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여러 층의 지배자들에 의한 착취로 민중의 삶은 경제적 압박으로 고통 받았고 전통적인 생활 방식, 특히 가족, 마을 공동체와 같은 기본적인 사회적 형태들이 해체되었다. 이와 같이 로마 제국의 질서는 군사적인 참화, 경제적인 억압, 피지배 민중의 전통적 문화와 사회적 구조의 유린을 초래하였다.
로마 황제와 지배 엘리트들은 자원에 대한 소유권과 군사적인 힘을 통하여 협력 관계를 만들어 갔고 지배 계층이 아닌 계층, 즉 민중을 통제하였다. 전체 주민의 75퍼센트를 차지했던 일반 민중의 농업 생산물과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지배 엘리트들은 사치스럽고 우아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지배 엘리트들은 토지와 무역으로부터 부(wealth)를 축적하였고, 제국 전체의 시민 생활과 군대의 다양한 직책에 인력을 공급하였다.
■ 로마 제국에 대한 저항
예수님과 신약 성경 시대에 로마 제국의 평화(Pax Romana)는 지배의 세계화를 가리킨다. 로마 제국은 세계를 통일시키고 그 세계를 위한 가치와 질서를 제공하였다. 그래서 로마 황제들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peacemaker)”으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점령 하에 살았던 사람들이 경험한 삶은 다른 것이었다. 로마 제국이 주장하는 통치 질서의 실상은 결코 평화롭지도 평등하지도 않았다. 제국 안에서는 억압과 착취에 고통 받던 민중의 저항이 계속되었고 이를 탄압하는 폭력과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결국 로마 제국의 평화는 억압과 착취, 그리고 군사력에 의한 침묵의 강요와 다름이 아니었다. 팔레스티나에서 벌어진 수많은 폭력사태는 로마 제국이 내세운 새로운 질서의 허상을 폭로한 것이었다. 기원후 1세기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던 팔레스티나에는 다양한 민중의 저항 운동들이 있었다.
『유다 고대사』 20권 97-98은 기원후 44-46년 동안 유다 총독이었던 파두스(Fadus) 당시의 사건을 기록한다. “파두스가 유다 총독이었을 때 테우다스라는 사기꾼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소유 재산을 모아 요르단 강으로 그를 따르도록 현혹시켰다. 그는 자신이 예언자이고 요르단 강을 갈라 그들이 걷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그는 많은 이들을 속였다. 파두스는 그들이 어리석음의 결실을 거두도록 허락하지 않고 기병대를 보냈다. 많은 이들을 죽였고 많은 포로를 잡았다. 테우다스는 생포되어 그의 목이 잘려 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 이것은 쿠스피우스 파두스가 총독이었을 때 유다인들에게 일어난 사건이다.”
『유다 전쟁사』 2권 261-263은 기원후 52-60년 동안 유다 총독이었던 펠릭스(Felix) 당시의 사건을 언급한다. 이 사건은 『유다 고대사』 20권 169-172에도 기록되어 있다. “유다인들에게 더 나쁜 피해를 준 이는 이집트인인 어떤 거짓 예언자였다. 그는 예언자라는 명성을 얻은 협잡꾼이었다. 그는 촌락에 나타나 3만 명의 얼간이들을 모았으며 그들을 이끌고 광야를 돌아 올리브 산이라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가서 로마 군대의 주둔지를 제압하고 자신을 백성 위에 군림하는 통치자로 세우도록 계획하였다. 그러나 펠릭스는 이 공격을 미리 예상하였다. 펠릭스는 중무장한 보병을 그에게 보냈는데 온 주민이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합류했다. 그 결과로 이집트인과 몇몇 추종자는 도망쳤으나 대부분은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생존자들은 흩어졌고 각자 집으로 도망쳤다.”
■ 예수님의 대안
이와 같이 로마 제국은 예수님이 사셨고 활동하신 팔레스티나에서의 삶의 조건을 결정지었다. 예수님은 예언자적인 가르침과 행동을 통해서 로마 제국의 질서와 그것이 피지배 민중에 끼친 영향에 저항하고 도전하셨다. 예수님은 이러한 로마의 군사적 폭력과 경제적 착취로 인한 결과들을 치유하고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다시 회복하는 운동을 시작하셨다. 그분은 가난하고 배고픈 민중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제시하심으로써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희망이 움트게 하셨다. 예수님의 운동은 계약의 공동체를 다시 새롭게 하는 것(renewal of covenantal community)이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3년 12월호,&: 10pt; margin-bottom: -1px;">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25) 예루살렘 성전 1
예루살렘의 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에 있어서 중심 역할을 하였다. 성전은 하느님의 집, 곧 그분의 현존을 의미할 뿐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만남의 장소, 곧 친교와 경신례의 장소였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의 의미는 다음 시편에서 잘 드러난다.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 올려라.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환호하며 그분 앞으로 나아가라. 너희는 알아라, 주님께서 하느님이심을. 그분께서 우리를 만드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이어라. 감사드리며 그분 문으로 들어가라. 찬양드리며 그분 앞뜰로 들어가라. 그분을 찬송하며 그 이름을 찬미하여라. 주님께서는 선하시고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며 그분의 성실은 대대에 이르신다.”(시편 100,1-5) 현재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이슬람의 황금 돔 대사원이 있는 곳이 바로 과거 유다인들의 성전이 있었던 장소이다. 성전은 언제 세워졌고 또 언제 파괴되었는가? 이제 그 예루살렘 성전의 역사를 살펴보자.
■ 솔로몬의 성전
다윗이 예루살렘을 차지하였을 때, 그는 그곳을 수도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예루살렘은 그 어떤 지파에도 속하지 않은 도시로서 북과 남을 가르는 경계에 위치하여 다른 지파들의 견제를 피할 수 있었고 다윗에게 정치적 독립을 선사하였다. 사실 성조들과 연관이 있는 여러 성소들이 있었으나 다윗은 예루살렘을 왕국의 종교적 수도로 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키르얏 여아림에 있던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하였다. “키르얏 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주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그들은 주님의 궤를 언덕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옮기고, 그의 아들 엘아자르를 성별하여 그 궤를 돌보게 하였다.”(1사무 7,1) 마침내 계약의 궤는 다윗의 성에 우선 이집트 탈출 때처럼 천막 아래 모셔졌다. “다윗은 기뻐하며 오벳 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하느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 다윗과 온 이스라엘 집안은 함성을 올리고 나팔을 불며, 주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그들은 다윗이 미리 쳐 둔 천막 안 제자리에 주님의 궤를 옮겨 놓았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주님 앞에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쳤다. 다윗은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다 바친 다음에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였다.”(2사무 6,12-18)
다윗의 성 북쪽에 위치한 언덕 꼭대기에 바위가 있었다. 그곳은 아마도 가나안인들의 제사 장소로 사용된 듯하다. 구약성경은 이 장소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었다는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가드가 그날 다윗에게 와서 말하였다.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올라가시어 주님을 위한 제단을 세우십시오.’ 다윗은 가드의 말에 따라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그곳에 올라갔다. 아라우나가 내려다보니, 임금과 그 신하들이 자기에게 건너오고 있었다. 아라우나는 곧 임금 앞에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였다. 그러고 나서 아라우나는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께서 무슨 일로 이 종에게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다윗이 대답하였다. ‘그대에게 타작마당을 사서 주님을 위한 제단을 쌓아 드리려고 하오. 그러면 재난이 백성에게서 돌아설 것이오.’”(2사무 24,18-21) 다윗은 제단을 쌓고 제사를 바치기 위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구입하였다. “다윗은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쳤다.”(2사무 24,25)
그러나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우는 일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것은 나탄의 예언에서도 언급된다.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2사무 7,12-13)
사실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수도를 확장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북쪽 언덕, 곧 옛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위에 궁전과 성전을 세우려 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사 년째 되던 해 지우 달,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은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1열왕 6,1) 이곳은 모리야 산으로도 불린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모리야 산에 주님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곳은 주님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으로서, 본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는데 다윗이 집터로 잡아 놓았다.”(2역대 3,1) 그리하여 솔로몬은 기원전 960년경에 페니키아인들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웠다. 티로 임금 히람은 레바논 향백나무와 방백나무를 보냈다.(1열왕 5,15-32; 2역대 2,2-15) 이것이 솔로몬의 성전(Solomon’s Temple)으로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제1성전(First Temple)이다. 솔로몬은 이 성전에 계약의 궤를 모셨다. 이 성전을 묘사하는 성경 본문(1열왕 5,15-7,5)은 이집트 탈출 이후 하느님이 모세에게 만남의 천막을 세우기 위해 명령하신 본문(탈출 25-31장; 35장)과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솔로몬의 성전은 기원전 587년에 바빌론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 파괴되었다.
■ 제2성전
약 50년가량의 바빌론 유배 이후, 유다인들은 귀환하였다. 그들은 다시 제단을 쌓고 제사를 바쳤다. 성전의 재건축은 기원전 537년에 세스바차르에 의해 시도되었고, 예언자 하까이와 즈카르야의 지원으로 기원전 520-515년 동안 즈루빠벨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이렇게 유배 이후 다시 세워진 성전을 우리는 제2성전(Second Temple)이라 한다. 사실 기원전 587년의 유다 왕국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그리고 뒤이은 바빌론 유배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엄청난 상실이요 위기였다. 유배에서 되돌아온 유다인들의 주된 관심사며 과제는 상실의 회복, 과거의 복구와 재건이었다. 이 과제는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통하여 가시화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대사제는 동시에 유배 이후 유다 민족의 권위 있는 최고 지도자로서의 역할도 함께 했다. 새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이 있었던 자리에 같은 구조로 세워졌으나 그 규모는 첫 번째 성전에 비하여 작았다.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 가운데에서 주님의 옛집을 보았던 많은 노인들은, 자기들의 눈앞에서 이 주님의 집 기초가 놓인 것을 보고 목 놓아 울었다. 그러는가 하면 다른 많은 이들은 기뻐하며 목청껏 환호성을 올렸다.”(에즈 3,12)
제2성전은 기원전 1세기 후반에 헤로데 대왕(King Herod the Great, 기원전 37-4년)에 의해 더 웅장하게 확장되었다. 이두매아인인 헤로데는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성전을 다시 개조하는 작업을 기원전 20년에 시작하였다. 성전은 화려하게 꾸며졌고 그 면적은 두 배로 늘어났다. 이 헤로데의 작업은 요세푸스의 문헌인 『유다 전쟁사』 5권 184-237과 『유다 고대사』 15권 380-425뿐 아니라 라삐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바빌론 유배 이후 약 5세기 동안 유다인들의 경신례의 중심이 되었던 제2성전은 제1차 유다 항쟁이 진압되었던 기원후 70년에 로마제국의 티투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후 이 성전은 제2차 유다 항쟁 당시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132년에 완전히 파괴되었다. 로마 황제는 예루살렘을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고 불렀고 성전이 있었던 곳에 제우스 신상을 세웠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4년 1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26) 예루살렘 성전 2
■ 예수님 시대의 성전
예루살렘의 성전산(Temple Mount)은 당시 유다인들의 삶에서처럼 역사적 예수님의 삶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바빌론 유배 이후 세워진 제2성전인데, 헤로데 대왕에 의해 증축된 것이다. 헤로데의 성전산(Herodian Temple Mount)의 크기는 남북으로 450m, 동서로 300m 가량 되었다.
성전은 여러 경계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방인들에게도 개방되었던 “이방인의 뜰(Court of the Gentiles)”, 이스라엘의 남자와 여자들을 위한 “여자들의 뜰(Court of the Women)”, 이스라엘의 남자들만을 위한 “이스라엘의 뜰(Court of the Israelites)”, 그리고 사제들에게만 허용된 “사제들의 뜰(Court of the Priests)”이 있었다. 그래서 전체 성전산은 본격적인 의미의 성전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의 뜰”로 나눌 수 있었다. 이 둘 사이에는 난간이 있었고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명각(Inscription)에 경고문이 새겨졌다. 즉 이방인이 들어올 수 없음을 알리고 이를 어길 경우 죽음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경고였다.
성전산의 넓은 뜰을 둘러싼 벽들이 사방에 있었고 성전의 뜰 안으로 통했던 문들과 계단들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현재 성전산 부근 남쪽에서 우리는 정결예식에 사용되었던 다양한 형태의 목욕 시설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성전산의 북서쪽 모퉁이에는 안토니아 성채(Antonia fortress)가 있었고 마태 4,5에 언급되는 성전 꼭대기는 성전산의 남동쪽 끝이었을 것이다.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5-7)
성전산의 사방 벽에는 주랑들이 있었는데 남쪽의 왕궁 주랑(Royal Portico)의 기둥들은 네 줄로 되어 있었고 나머지 주랑들은 두 줄로 이루어져 있었다. 동쪽에는 “솔로몬의 주랑(Solomon’s Portico)”이 있었다. 이 주랑들에서는 율법학자들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토론하였고, 제물로 바칠 짐승들을 파는 장수들과 환전상들이 있기도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 파스카 축제 때의 일을 전하는 루카 2,41-52에 따르면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46절) 그리고 마르 11,15-19에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전한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다.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엎으셨다. 또한 아무도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 로 만들어 버렸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군중이 모두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그분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날이 저물자 예수님과 제자들은 성 밖으로 나갔다.”
요한 10,22-39은 예수님과 유다인들 간의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논쟁 이야기이다. 요한 복음서는 공관 복음서들(마태 26,59-66; 마르 14,55-64; 루카 22,66-71)과는 달리 최고 의회에서의 예수님 재판을 전하고 있지 않지만 그 재판의 중요한 요소들을 10,22-39의 성전 봉헌 축제 때의 논쟁 안에서 소개한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다.”(요한 10,22-23) 요한 10,30에 따르면, 예수님이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말하자 유다인들은 그를 신성모독으로 비난하며 돌로 치려 한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님은 한갓 사람이면서 스스로를 하느님으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성전 봉헌 축제 때의 논쟁에서 유다인들과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다음의 질문들이 제기된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아들”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위해 우리의 관심은 요한 본문의 시간적 배경, 즉 성전 봉헌 축제에 집중된다. 이 축제는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 성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1마카 1,54; 다니 9,27; 11,31; 12,11)을 세운 지 3년 후, 즉 기원전 164년 키슬레우 달 25일에 유다 마카베오의 지휘 하에 성전과 그 제단이 정화된 사건(1마카 4,36-61; 2마카 10,1-9)을 기념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하에서 요한 본문의 성전 봉헌절 축제에 참여하는 유다인들은 과거의 불행한 역사와 함께 그것을 초래한 인물, 즉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신성모독적 거만에 의해 자신을 하느님으로 자처했다는 사실을 기억했던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산의 솔로몬 주랑은 사도행전에서도 소개된다.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데, 온 백성이 크게 경탄하며 ‘솔로몬 주랑’이라고 하는 곳에 있는 그들에게 달려갔다.”(사도 3,11)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사도 5,12)
본격적인 의미의 성전은 “여자들의 뜰”, “이스라엘의 뜰”, “사제들의 뜰”, 그리고 성소(Sanctuary)와 지성소(Holy of Holies)로 이루어졌다. 성소와 지성소는 길이와 너비가 9m, 높이가 18m 가량이었다. 지성소에는 오직 대사제만이 1년에 한번, 즉 대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자들의 뜰”에는 성전의 헌금함이 놓여 있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마르 12,41-42) “여자들의 뜰”로 들어가는 동쪽 문은 “아름다운 문”으로 불렸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사도 3,1-2)
헤로데 성전의 벽들 중에서 서쪽 벽은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다. 높이 18m, 너비 60m의 이 서쪽 벽(West Wall)을 흔히 “통곡의 벽(Wailing Wall)”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곳을 찾는 유다인들이 기원후 70년에 파괴된 성전과 조상들의 비극적인 역사를 기억하며 통곡하기 때문이다. 이 통곡의 벽은 현재 유다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장소이다. 세계 각지에서 온 유다인들이 이 통곡의 벽을 순례하는데, 그들의 기도와 염원을 쪽지에 적어 벽의 돌 뜸새에 끼워 넣는다. 현재 통곡의 벽은 아래에서 약 열 한 번째까지의 큰 돌은 헤로데 대왕 시대의 것이고, 그 위의 중간 크기의 다섯 줄은 초기 아랍 시대, 그리고 나머지 윗부분의 조그만 벽돌들은 19세기의 것이다. 현재도 이 통곡의 벽에서는 이스라엘의 중요한 종교적, 정치적 행사들이 다양하게 벌어진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4년 2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27) 벳자타 못과 실로암 못
요한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두 가지 치유 이야기가 전해진다. 요한 5,1-18은 벳자타 못가에서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이고, 요한 9,1-12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 주신 이야기이다. 이 두 치유 사건은 예루살렘의 두 지명, 곧 벳자타 못과 실로암 못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 두 곳의 공통점은 물과 관련된 못이라는 것이다. 이제 이 두 못에 대하여 차례로 살펴보자.
1. 벳자타 못 현재 예루살렘 구시가(Old City)의 동쪽 성벽에는 성 스테파노의 문이 있다. 이 성문은 “사자의 문”, “양 문”(Sheep Gate, 느헤 3,1), “안나의 문”, “마리아의 문”이라고도 불린다. “안나의 문”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인 안나의 집이 성문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 스테파노의 문 근처에는 성 안나 성당(Church of Saint Anne)이 있다. 비잔틴 전승에 따르면, 성모 마리아와 그녀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의 집터에 경당이 세워졌다. 이 성 안나 성당 바로 옆에 요한 5장의 치유 사건이 일어난 벳자타 못(Pool of Bethzatha)이 있다. 좌우 두 개의 못으로 이루어진 벳자타 못은 가로 50m, 세로 150m, 깊이 15m 가량이었다.
기원전 8세기에 빗물을 저장하기 위해 둑이 만들어졌는데 이사 7,3; 2열왕 18,17에서 “윗저수지”로 소개된다. 이 저수지의 물은 바위를 깎아 만든 수로를 통해 다윗 성 안으로 흘렀다. 기원전 200년경에 대사제 시몬은 이 수로를 터널로 바꾸었다. 시몬은 예루살렘 성전에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기존의 둑 남쪽에 두 번째 못을 만들어 쌍둥이 못을 건설하였다. “오니아스의 아들 시몬은 대사제로서 생전에 주님의 집을 수리하고 자기 생애에 성전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는 안뜰의 높은 벽의 기초를 놓았고 성전을 둘러싸는 담을 높이 쌓아 올렸다. 그는 자기 생애에 저수 동굴을 팠는데 그 웅덩이 둘레는 바다 같았다.”(집회 50,1-3) 그 후 여러 세기 동안 못의 동쪽에 있던 자연 동굴들은 목욕 시설로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종교적인 역할뿐 아니라 병을 고치기 위한 기능도 하였다. 사실 이 둘은 분리되지 않았다. 쌍둥이 못은 사용되지 않았는데, 헤로데 대왕이 성전에서 제물로 사용될 동물들을 씻는 이스라엘의 못(Pool of Israel)을 성전 근처에 만들었다.
현재 예루살렘 신시가(New City)의 남서쪽에 위치한 홀리랜드 호텔(Holyland Hotel)에는 제2성전(Second Temple) 시대의 고대 예루살렘 모형이 있다. 이곳에서 두 개로 이루어진 당시 벳자타 못의 모형을 확인할 수 있다.
요한 5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그 뒤에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예루살렘의 ‘양 문’ 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1-3절) 벳자타라는 이름은 “자비의 집(House of Mercy)”을 의미하는데 치유의 성소에 적합했다. 벳자타 못에서 예수님은 서른여덟 해나 앓던 병자를 고쳐 주셨다. 요한 복음서에서 언급된 다섯 주랑을 확인한 이는 오리게네스(231년경)였다. 그는 쌍둥이 못에서 가장자리의 네 주랑과 가운데의 한 주랑을 언급하면서 요한 복음서의 다섯 주랑과 처음으로 연결하여 소개한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벳자타 못의 주랑을 보았는지는 의심스럽다.
5세기 중반에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기념하는 경당이 세워졌다. 이 경당은 615년에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1009년 칼리프 알-하킴(al-Hakim)이 그리스도교 성지를 파괴한 이후, 십자군 시대에 이 폐허 위에 다시 성당이 세워졌다. 성 안나 성당은 웅장한 로마네스크식으로 성모 마리아의 집터에 세워졌다. 1192년 7월 25일에 살라딘은 이 성당을 이슬람 종교 학교로 바꾸었다. 1856년에 오스만 터키 제국은 크림 전쟁 때 지원해 준 프랑스에게 감사의 의미로 성 안나 성당을 선물하였다.
2. 실로암 못
키드론 계곡의 기혼 샘(Gihon Spring)은 예루살렘 초기 정착 시기부터 유일한 물 공급원이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기혼 샘에서 기름부음을 받았다.(1열왕 1,45) 기혼 샘의 물을 실로암 못까지 끌어들이기 위해 히즈키야는 터널을 만들었다. “기혼 샘의 위쪽 물줄기를 막아 다윗성 서쪽 밑으로 돌려 끌어들인 것도 바로 히즈키야이다.”(2역대 32,30) “히즈키야의 나머지 행적과 그의 모든 무용, 그리고 그가 저수지와 수로를 만들어 도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인 일에 관해서는 유다 임금들의 실록에 쓰여 있지 않은가?”(2열왕 20,20) 히즈키야 터널(Hezekiah’s Tunnel)은 전체 길이가 약 512m이다. 평균 폭은 60cm, 높이는 1.45-5m에 이른다. 물의 깊이는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 20-80cm이다.
실로암 못(Pool of Siloam)은 이사 8,6에서 “잔잔히 흐르는 실로아 물”로 묘사된다. 요한 9장에서 예수님은 눈먼 이를 고치시는데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7절) 루카 13,4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전한다.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실로암 못의 초기 형태는 역사 속에 이미 사라졌다. 아마도 헤로데 대왕이 예루살렘 건설의 큰 계획을 세웠을 때 실로암 못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었을 때 실로암 못의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 다음날 로마 군대는 강도들을 하부 도시에서 몰아내고 실로암 지역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불태웠다. 로마 군대는 도시가 불타는 광경을 보고 기뻐했지만 약탈할 것이 없어 실망했다. 저항군이 상부 도시로 달아나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을 없애버렸기 때문이다.”(『유다 전쟁사』 6권 363)
보르도(Bordeaux) 순례자들(333년)의 기록에 따르면, 실로암 못에는 네 개의 주랑이 있었는데,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이것은 135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건설된 못을 가리킨다. 실로암 못은 요한 9장의 치유가 있었던 곳이었기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곳을 순례하였다. 실로암의 첫 성당은 450년경에 황제의 부인인 에우도키아(Eudokia)에 의해 세워졌다. 고고학적 발굴은 570년경의 피아첸차(Piacenza) 순례자가 묘사한 “사람들은 여러 계단으로 실로암까지 내려간다. 실로암 위에 큰 성당이 있는데, 그 아래로 실로암의 물이 솟아오른다.”라는 기록을 입증하였다. 실로암의 성당은 614년에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런데 실로암 물의 치유 능력에 대한 믿음은 비잔틴 순례자들에 의해 강조되었고, 아랍인들에게도 계속되었다. 여러 문헌들은 실로암 못 주위의 주랑이 15세기까지 있었다고 암시한다. 1890년대에는 실로암에 이슬람 사원이 세워졌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월간빛, 2014년 3월호,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28) 최후 만찬 기념 성당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이후 수난 당하시기 전날 저녁에 당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잡수셨다. 이 최후 만찬에서 예수님은 성체성사를 설정하셨다. 성체성사의 거행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교회의 삶에서 중심을 이루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전승은 그 시초에서부터 예수님의 최후 만찬이 거행된 장소를 찾고, 기억 · 기념하였다.■ 위치와 지형
오늘날 시온 산(Mount Sion)은 예루살렘의 남서쪽 언덕을 가리킨다. 이곳은 해발 765m의 높이로 구시가(Old City)의 남쪽 성벽에 있는 시온의 문(Sion Gate) 밖에 위치하는데, 서쪽과 남쪽에는 힌놈 계곡(Hinnom Valley)이 있고 동쪽으로는 티로포에온 계곡(Tyropoeon Valley)이 있다. 그런데 구약 성경 시대에 시온이라고 불린 곳은 예루살렘의 동쪽 언덕이었다. “다윗은 시온 산성을 점령하였다. 그곳이 바로 다윗 성이다.”(2사무 5,7) 시온이라는 이름이 서쪽 언덕을 가리키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세기인데, 미카 3,12의 본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 때문에 시온은 갈아엎어져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폐허 더미가 되며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수풀 언덕이 되리라.”(미카 3,12) 여기에서 미카 예언자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세 가지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보르도(Bordeaux)의 순례자들(기원후 333년)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본문을 예루살렘의 두 언덕을 묘사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즉 동쪽 언덕이 성전산(Temple Mount)이었다면, 서쪽 언덕은 시온 산이었다.
현재의 시온 산 지역이 처음으로 예루살렘 성벽 안에 포함된 것은 기원전 2세기였다. 기원후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파괴하였는데, 현재의 남쪽 성벽은 기원후 135년의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에 주둔했던 로마 군대 주둔지의 남쪽 경계였다. 444년-460년 사이에 로마 황제의 부인인 에우도키아(Eudokia)는 시온 산 부근의 옛 성벽을 다시 세우도록 하였다. 이 성벽은 975년까지 존속했는데, 칼리프 엘-아지즈(el Aziz)는 그것을 무너뜨렸다. 살리딘(Saladin)은 다윗의 무덤을 포함하기 위하여 십자군의 성벽을 연장하였다. 기원후 16세기 술탄 슐레이만 2세에 의해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될 때 시온 산 지역은 성벽 바깥에 위치했다. 비잔틴 시대인 6세기의 마다바(Madaba) 지도에는 당시의 시온 산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오늘날 시온 산에는 최후 만찬 기념 경당, 다윗의 무덤, 최후 만찬 기념 성당, 성모 승천 기념 성당, 베드로 회개 기념 성당 등이 있다.
■ 신약 성경의 기록
오랜 그리스도교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의 최후 만찬(마르 14,22-26)과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요한 20,19-23), 그리고 초대 교회의 사도들의 모임(사도 1,12-14)과 성령 강림(사도 2,1-13) 등의 사건들은 시온 산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마르 14,12-16; 마태 26,17-19; 루카 22,7-13에 따르면 예수님의 최후 만찬은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층 방”에 준비된다. 그리고 최후 만찬 이야기는 마르 14,22-26; 마태 26,26-30; 루카 22,14-20; 1코린 11,23-25에 기록되어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는 요한 20,19-23에 소개된다. 사도 1,12-14에는 사도들이 모여 있던 성안의 위층 방이 언급되고 사도 2,1-3은 오순절에 사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고 전한다.
■ 중요 순례 장소
① 최후 만찬 기념 경당
시온의 문을 통과해서 시온 산으로 좁은 골목길로 가면 하나의 첨탑과 작은 둥근 지붕을 가진 중세 시대의 건물을 만나는데, 아래층에는 다윗의 묘지가 있고 위층에는 최후 만찬 기념 경당(Coenaculum)이 있다. 이 경당은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최후 만찬이 거행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객관적인 근거는 불확실하지만, 이 전통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이미 5세기 초에 이 전통에 대한 기록이 있다. 403년에 죽은 성 에피파니우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도시는 티투스가 파괴한 채로 남아있었는데 예외적으로 몇몇 건물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사도들이 성령 강림을 기다렸던 장소에 세워진 작은 성당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에 따르면 최후 만찬의 장소는 사도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신 사건과 함께 시온 산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졌다. 그것은 사도들이 모여 있던 “위층 방”(사도 1,13; 2,1)을 최후 만찬이 거행된 “이층 방”(마르 14,15)과 동일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르도의 순례자들은 이 사건들과 시온 산 사이의 연관성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에제리아(Egeria)는 성령 강림과 관련 있는 건물이 있다고 기록하면서 “이 장소는 이제 성당으로 변화되었다.”라고 말하고 시온 산의 성당에서 주님의 발현과 성령 강림을 기념하는 전례를 거행하였다고 기억한다. 그 후 파괴된 성당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요한 2세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614년에 페르시아인들은 이 성당을 파괴하였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성당은 성벽 바깥에서 파괴되어 있었다. 그래서 성당을 재건하였는데, 이 또한 그 후 파괴되었다. 마침내 1333년에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큰 성당과 수도원을 세웠다. 그런데 이 성당은 16세기에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고, 그리스도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1948년 이후 이스라엘 정부는 최후 만찬 기념 경당에 출입을 허용하였으나 전례 거행은 금지하였다.② 다윗의 무덤
최후 만찬 기념 경당의 아래층에는 다윗의 무덤이 있다. 유다인들에게 이 장소는 통곡의 벽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성소의 하나이다. 사실 성경에 따르면, 다윗은 그의 성 동쪽 언덕 위에 묻혔다. “다윗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 성에 묻혔다.”(1열왕 2,10) 비잔틴 시대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서쪽 언덕을 시온 산으로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기원후 10세기까지는 그 누구도 그곳에 다윗의 무덤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십자군 시대에는 시온 산의 다윗 무덤을 경배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다윗 조상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사도 2,29)라는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에서 시온 산과 다윗의 무덤 사이의 연관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유다인들도 12세기부터 이곳을 순례하였다. 15세기에는 다윗 임금과 함께 매장된 전설적인 보물(『유다 고대사』 16권 179-182)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4세기에 이곳을 재건한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추방되었다. 다윗의 무덤은 16세기에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다가 1948년 이후에는 유다교 회당과 탈무드 학교가 되었다. 이와 같이 오늘날 다윗의 무덤은 역사적이고 고고학적인 근거가 있다기보다는 그리스도인, 유다인, 이슬람인의 신심에 의한 것이다.
③ 최후 만찬 기념 성당
최후 만찬 기념 경당에서 나와 약 100m 가량 걸으면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의해 세워진 최후 만찬 기념 성당이 있다. 이 성당은 1936년에 건립되었는데,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요한 2세에 의해 세워졌던 옛 성당의 한 부분 위에 세워졌다. 성당은 최후 만찬 기념 경당(Coenaculum)을 향하여 있어 Ad Coenaculum이라고 불렸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월간빛, 2014년 4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29) 겟세마니
예루살렘 성 안에서 최후 만찬을 마친 예수님과 제자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마르 14,26) 그리고 “그들은 겟세마니라는 곳으로 갔다.”(마르 14,32) 즉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거기에 정원이 하나 있었는데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들어가셨다.”(요한 18,1) 예수님은 겟세마니에서 깊은 고뇌에 싸여 간절히 기도하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체포되셨다.
위치와 지형
올리브 산은 예루살렘의 동쪽 키드론 계곡 건너편에 위치한 해발 820m의 산이다. 구약 성경에서 올리브 산은 “예루살렘 맞은편 동쪽에 있는 올리브 산”(즈카 14,4), “예루살렘 동쪽 산”(1열왕 11,7)으로 표현된다. 이 산의 명칭은 그곳에 많은 올리브 나무들과 관련이 있다. “‘산으로 나가서 올리브 나무 가지, 소나무 가지, 도금양나무 가지, 야자나무 가지, 그 밖에 잎이 무성한 가지를 꺾어다가, 쓰여 있는 대로 초막을 만들어라.’ 하는 말을 그들이 사는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울려 퍼지게 하라고 쓰인 것을 발견하였다.”(느헤 8,15) 겟세마니는 예루살렘 성전 맞은 편의 올리브 산 하단 부분에 위치한 곳이다. 겟세마니(Gethsemane)라는 이름은 올리브 나무의 열매로 “기름을 짜는 틀(oil press)”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의 겟세마니
예수님 당시의 유다인들은 파스카를 비롯한 순례 축제 때 예루살렘에 와서 올리브 산의 비탈과 그 주변의 동굴들에서 머물렀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올리브 산의 겟세마니를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밖으로 나가시어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루카 22,39) 요한 18,2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러 번 거기에 모이셨기 때문에” 라고 소개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하는 동안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하고 말씀하신 다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그분께서는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셨다.”(마르 14,32-33) 루카 22,41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러고 나서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에 혼자 가시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마르 14,35-36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런 다음 앞으로 조금 나아가 땅에 엎드리시어, 하실 수만 있으면 그 시간이 당신을 비켜 가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예수님이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루카 22,44)
“그러고 나서 돌아와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하시고, 다시 가셔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그리고 다시 와 보시니 그들은 여전히 눈이 무겁게 내리감겨 자고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분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랐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 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이제 되었다. 시간이 되어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마르 14,37-42)
마르 14,43-50은 겟세마니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시는 장면을 전한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다가왔다. 그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보낸 무리도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다. ‘그분을 팔아넘길 자는, 내가 입 맞추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붙잡아 잘 끌고 가시오.’ 하고 그들에게 미리 신호를 일러두었다. 그가 와서는 곧바로 예수님께 다가가 ‘스승님!’ 하고 나서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어 그분을 붙잡았다. 그때 곁에 서 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그의 귀를 잘라 버렸다. 예수님께서 나서시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지만 너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리된 것이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긍정적으로 응답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 뒤를 따랐다. 제자들은 이전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과의 친교(communion)를 선택하여 그분과의 공동체(community)를 형성하였다. 갈릴래아에서 시작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 친교와 공동체는 예루살렘에서, 더욱이 겟세마니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시는 순간에 결정적인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중요 순례 장소
① 겟세마니 대성당
예수님이 체포 직전에 기도하셨던 겟세마니 정원에는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성당이 세워졌다. 현재의 대성당은 379-384년 사이에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세워진 성당의 자리에 위치한다. 4세기의 이 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전에 예루살렘 공동체에 의해 경배된 자리에 건축되었다. 이 성당은 에제리아(Egeria)가 “우아한 성당(the elegant church)”이라고 기록한 곳인데, 7세기에 페르시아군에 의해 훼손되었고, 724-725년에는 순례자 빌리발드(Willibald)에 의해 마지막으로 언급된다. 그런데 20년 후 지진으로 인해 성당은 파괴되었다. 이 폐허 위에 십자군들은 1170년경에 기도실을 세웠다. 그 후 성당이 다시 세워졌는데 1323년에도 제 역할을 하였으나 1345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파괴되었다. 오늘날의 겟세마니 대성당은 이러한 역사 위에 1924년에 세워졌다. 이 대성당은 “고뇌의 대성당(Basilica of the Agony)”이라고 불리고, 여러 민족의 재정적 지원으로 건립되어 “모든 민족들의 성당(Church of All Nations)”라고도 불린다. 대성당의 중앙 제대 앞에는 예수님이 엎드려 기도하신 바위가 있다.
② 겟세마니 동굴 성당
겟세마니 대성당에서 약 150m 떨어진 곳에 겟세마니 동굴 성당이 있다. 이 동굴 성당은 비잔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 따르면, 예수님이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에 혼자 가시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루카 22,41)을 때, 제자들이 잠들었던 곳이다. 그리고 여러 고대 증언들에 따르면, 이곳이 예수님이 체포되셨던 곳이다. 겟세마니 동굴 성당은 1681년 이후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4년 5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30) 대사제 카야파의 저택
올리브 산의 겟세마니에서 체포되신 예수님은 대사제의 저택으로 끌려가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대사제에게 끌고 갔다. 그러자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이 모두 모여 왔다.”(마르 14,53) 같은 장면을 전하는 마태 26,57은 대사제의 이름을 카야파로 명시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카야파 대사제에게 끌고 갔다.”(마태 26,57) 예수님은 카야파 대사제의 저택에서 최고 의회로부터 신문받으셨다. 그때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뒤따라 대사제의 저택 안뜰까지 들어가, 시종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마르 14,54) 베드로는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르 14,30)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분을 부인했다.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난 대사제 카야파의 저택에 대한 문헌 연구와 고고학적 발굴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 위치와 지형
오늘날의 시온 산(Mount Sion)에 있는 최후 만찬 기념 경당(Coenaculum)에서 나와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던 방향으로 남쪽 성벽을 따라 걷다가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세 계곡인 힌놈 계곡(Hinnom Valley), 티로포에온 계곡(Tyropoeon Valley), 키드론 계곡(Kidron Valley)과 옛 다윗 성(City of David)을 바라다 볼 수 있는 전망대를 만난다. 이 전망대 근처에, 즉 시온 산의 남동쪽 비탈에 베드로 닭 울음 성당(Saint Peter in Gallicantu)이 있다. 이 성당은 전통적으로 대사제 카야파의 저택에 세워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한 반대 의견도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대사제 카야파의 저택이 현재 예루살렘의 아르메니아 정교회 공동묘지 부근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 신약성경의 대사제 카야파 세례자 요한의 등장을 전하는 루카 3,1-2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라고 기록한다. 요한 11,49-51에 따르면 카야파는 “그 해의 대사제”, 즉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당하신 그 해의 대사제였다. 사실 카야파는 기원후 18-36년 사이에 예루살렘 성전의 대사제였다. 그리고 카야파는 한나스의 사위였다. “한나스는 그 해의 대사제 카야파의 장인이었다.”(요한 18,13) 사도 4,6에도 한나스와 카야파는 함께 언급된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회에서 증언했을 때, “그 자리에는 한나스 대사제와 카야파와 요한과 알렉산드로스와 그 밖의 대사제 가문 사람들도 모두 있었다.” 대사제 카야파는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유다 고대사』 18권 35와 95에서도 언급된다.
대사제 카야파의 저택에서 “수석 사제들과 온 최고 의회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고 그분에 대한 증언을 찾았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마르 14,55) 왜냐하면 사실 많은 사람이 그분께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였지만, 그 증언들이 서로 들어맞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대사제는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라고 질문하고 예수님은 “그렇다.”(마르 14,61-62)라고 대답하신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정체(identity)와 관련하여 “하느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임을 인정하신다. 마침내 대사제는 “자기 옷을 찢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이 더 필요합니까? 여러분도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듣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단죄하였다.”(마르 14,63-64)
그리고 마르 14,66-72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다. “베드로가 안뜰 아래쪽에 있는데 대사제의 하녀 하나가 와서,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를 보고 그를 찬찬히 살피면서 말하였다. ‘당신도 저 나자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지요?’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겠소.’ 하고 부인하였다. 그가 바깥뜰로 나가자 닭이 울었다.”(66-68절) “조금 뒤에 곁에 서 있던 이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당신은 갈릴래아 사람이니 그들과 한패임에 틀림없소.’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 그러자 곧 닭이 두 번째 울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하였다.”(70-72절)
■ 중요 순례 장소
① 베드로 닭 울음 성당
베드로 닭 울음 성당 혹은 베드로 회개 기념 성당은 1925년에 프랑스의 성모 승천 수도회에 의해 세워졌다. 이 성당에는 헤로데 시대(기원전 37-기원후 7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매우 흥미로운 여러 유적들이 있는데, 바위를 깎아 만든 동굴, 물 저장소, 가축 우리 등이 발견되었다. 이들 중 바위 동굴은 당시 감옥으로 사용되었는데, 사람들은 이곳이 대사제 저택에 끌려온 예수님이 갇혀 있었던 곳이라고 여긴다. 고고학자들은 이 성당에서 6세기의 수도원 성당의 흔적들을 발견하였다. 675년경의 문헌은 이 옛 성당을 베드로가 배신 이후 눈물을 흘린 사건과 연결시킨다.
② 대사제 카야파의 저택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 닭 울음 성당을 대사제 카야파의 저택으로 여겨왔다. 사실 고고학자들은 이 성당 근처에서 로마제국 시대의 돌계단을 발굴하였다. 이 계단은 실로암 못과 겟세마니로 통하는 길이었는데, 예수님은 이 길을 통해 시온 산 지역과 겟세마니를 오고 가셨을 것이다. 그런데 대사제 카야파의 저택이 시온 산 정상에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1971년 고고학자들이 이 지역에서 발견한 귀족들의 주거 지역과 그 유물들을 증거로 삼는다.
■ 최근의 유골함 발견
1990년에 예루살렘의 남쪽에서 기원후 1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회석 유골함이 발견되었다. 이 유골함에는 60세가량의 노인 유골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몇몇 학자들은 유골함의 명각(inscription)을 “카야파의 아들 요셉”으로 읽고 이 인물을 신약 성경과 요세푸스의 문헌이 언급하는 대사제 카야파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유골함의 명각을 “카야파의 아들 요셉”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강한 반론이 제기되었고, 이 인물을 대사제 카야파와 동일시하는 가설은 그것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부족한 상황에서 설득력이 많지 않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4년 6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31) 십자가의 길 - 1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는 라틴어로 “슬픔의 길”, “고통의 길”의 의미로 예수님이 로마 총독 빌라도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골고타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신 약 800m가량의 길, 즉 십자가의 길(the Way of the Cross)을 가리킨다. 최후 만찬 이후 체포되신 예수님은 카야파 대사제의 저택에서 신문받으신 다음 “사람들이 예수님을 카야파의 저택에서 총독 관저로 끌고 갔다.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요한 18,28) 마태 27,1-2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아침이 되자 모든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기로 결의한 끝에, 그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 총독에게 넘겼다.”
■ 로마 총독 본시오 빌라도
본시오 빌라도(Potius Pilatus)는 기원후 26-36년 동안 유다의 로마 총독이었다. 20세기 중반까지 빌라도는 신약성경의 복음서(루카 3,1; 마태 27,1-26 병행), 요세푸스(Josephus)와 타치투스(Tacitus)의 문헌으로만 알려졌다. 요세푸스의 『유다 고대사』 18권 63-64은 역사적 예수님에 대한 기록인데 여기에 빌라도가 언급된다. 이 본문은 “플라비우스의 증언(Testimonium Flavianum)”이라 불린다.
“그 때에 예수라는 현자가 나타났다. 굳이 그를 사람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말이다. 그는 놀라운 일들을 행하는 자였고,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이들의 스승이었다. 그는 많은 유다인들과 많은 그리스인들을 끌어 들였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였다. 우리 가운데 앞선 이들의 고발에 의해 빌라도가 그를 십자가형에 단죄하였을 때, 먼저 그를 사랑하였던 이들은 그에 대한 사랑을 그만두지 않았다. 사흗날 그는 다시 살아서 그들에게 나타났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예언자들이 이 일들과 그에 대해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일들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를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는 부류는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다.”
로마 역사가 타치투스는 110년의 『연대기』 15권 44,2에서 그리스도인에 의한 네로의 박해를 언급한다. “그래서 그 소문을 잠재우기 위하여 네로는 그들을 용의자로 만들어 매우 잔인하게 처벌하였다. 추행으로 인해 미움을 받은 이들을 군중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이 명칭은 티베리우스 황제 통치 때 행정관 본시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당했던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다. 이 가증할 미신은 잠시 억눌려 있다가 악의 발생지인 유다뿐 아니라 온갖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것들이 모여들고 퍼져 나가는 로마에도 다시 침범했다.”
1961년에 지중해변의 카이사리아에 있는 로마 시대의 반원형 야외 극장에서 본시오 빌라도의 이름이 포함된 라틴어 명각(inscription)이 발견되었다. 명각이 새겨진 돌은 극장의 좌석으로 들어가는 입구들 중의 하나에서 계단의 층계참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발견될 당시 이미 돌의 왼쪽 부분이 심하게 깎인 상태였다. 이 명각에서 본시오 빌라도는 유다의 총독으로 표현된다. 이와 같이 카이사리아에서 발견된 명각은 예수님 시대에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 본시오 빌라도의 존재를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이다.
■ 십자가 길의 역사
오늘날의 십자가의 길은 예루살렘 구시가(Old City)의 동쪽 성벽에 있는 성 스테파노의 문으로부터 약 250m 떨어진 이슬람인 학교(Umariyya Boy’s School)에서 “주님 무덤 성당(the Holy Sepulchre)”까지 14처로 이루어져 있다. 제1처부터 제9처까지는 “주님 무덤 성당”에 이르는 길에 있고, 제10처부터 제14처까지는 이 성당 안에 위치한다. 과거 비잔틴 시대의 순례자들은 성 목요일 밤에 올리브 산에서 겟세마니와 성 스테파노의 문을 거쳐 골고타에 이르는 행렬을 하였다. 14세기에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주님 무덤 성당”에서 출발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었다. 오늘날의 비아 돌로로사처럼 안토니아 요새(Antonia Fortress)가 있었던 곳에서 시작하여 골고타에 이르는 십자가의 길과 각처가 확정된 것은 18세기이다. 14처 중에서 제1, 4, 5, 8처의 위치는 19세기에 정해졌다.
■ 제1처, 제2처와 관련된 복음서 본문
십자가의 길 중에서 예수님이 빌라도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신 제1처와 제2처는 다음의 복음서 본문들과 관련이 있다.
“축제 때마다 군중이 원하는 죄수 하나를 총독이 풀어 주는 관례가 있었다. 마침 그때에 예수 바라빠라는 이름난 죄수가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내가 누구를 풀어 주기를 원하오? 예수 바라빠요 아니면 메시아라고 하는 예수요?’ 하고 물었다. 그는 그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 있는데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당신은 그 의인의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지난밤 꿈에 내가 그 사람 때문에 큰 괴로움을 당했어요.’ 하고 말하였다. 그동안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군중을 구슬려 바라빠를 풀어 주도록 요청하고 예수님은 없애 버리자고 하였다. 총독이 그들에게 ‘두 사람 가운데에서 누구를 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그들은 ‘바라빠요.’ 하고 대답하였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그러면 메시아라고 하는 이 예수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하니, 그들은 모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였다. 빌라도가 다시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하자,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빌라도는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받아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 그러자 온 백성이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마태 27,15-26) 요한복음서 본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군사들에게 채찍질을 하게 하였다. 군사들은 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나서, 그분께 다가가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그분의 뺨을 쳐 댔다.”(요한 19,1-3) “이윽고 예수님께서 가시나무 관을 쓰시고 자주색 옷을 입으신 채 밖으로 나오셨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자, 이 사람이오.’하고 말하였다.”(요한 19,5) “그때부터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줄 방도를 찾았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그 사람을 풀어 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 누구든지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는 황제에게 대항하는 것이오.’ 하고 외쳤다.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리토스트로토스라고 하는 곳에 있는 재판석에 앉았다. 리토스트로토스는 히브리 말로 가빠타라고 한다. 그날은 파스카 축제 준비일이었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었다. 빌라도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여러분의 임금이오.’ 그러자 그들이 외쳤다.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빌라도가 그들에게 ‘여러분의 임금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이오?’ 하고 물으니, 수석 사제들이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들에게 넘겨주었다.”(요한 19,12-16)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4년 7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12pt;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32) 십자가의 길
① 제1처
성 스테파노의 문(St Stephen’s Gate) 근처에 있는 성 안나 성당(Church of Saint Anne)에서 구시가(Old City)로 통하는 길의 왼쪽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우마리야 학교(Umariyya Boy’s School)에 이른다. 이곳이 바로 예수님이 사형 선고를 받으신 십자가의 길 제1처가 시작되는 곳이다. 바위산에 위치한 이 자리는 안토니아 요새(Antonia Fortress)가 있었던 곳이다. 이 요새는 기원전 37-35년에 헤로데 대왕에 의해 세워졌다. 그리고 요새의 이름은 헤로데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정해졌다. 안토니아 요새는 예루살렘 성전을 보호하고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중 신심에서 안토니아 요새는 본시오 빌라도의 관저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이곳을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기억인 요한 18,28-19,16의 배경으로 여겼다. 구약 성경에 따르면 안토니아 요새가 있었던 자리, 즉 예루살렘 성전 부근에 대한 언급이 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주님을 위하여 도성이 ‘하난엘 탑’에서 ‘모퉁이 성문’에 이르기까지 세워질 것이다.”(예레 31,38) “대사제 엘야십이 형제 사제들과 함께 나서서 ‘양 문’을 세워 봉헌하였다. 또 문짝들을 달고, ‘백인 탑’까지, 그리고 ‘하난엘 탑’까지 이르는 구간을 봉헌하였다.”(느헤 3,1), “‘에프라임 문’ 위를 지나, ‘옛 문’과 ‘물고기 문’ 위, 그리고 ‘하난엘 탑’과 ‘백인 탑’으로 해서 ‘양 문’에 이르러, ‘경비대 문’에서 멈추었다.”(느헤 12,39)
유다인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유다 전쟁사』에는 안토니아 요새에 대한 기록이 있다. “안토니아 요새는 성전의 첫 번째 뜰에 있는 북쪽과 남쪽의 두 개의 주랑이 만나는 모퉁이에 있다. 요새는 50큐빗 높이의 바위 위에 세워졌는데 사방이 가파른 절벽으로 되어 있다. 이 요새는 헤로데 임금의 작품인데 그의 타고난 재주가 가장 잘 드러난다. 바위는 아래로부터 매끈한 돌판으로 덮여 있는데, 이것은 장식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거기에 올라가려거나 내려가려는 자는 누구나 미끄러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요새 앞에는 3큐빗 높이의 성벽이 있고, 그 뒤로는 40큐빗 높이의 요새 전체가 솟아 있다. 요새 내부는 왕궁의 외관과 시설과 유사했는데, 각기 형태와 목적에 맞게 방들이 나뉘어져 복도와 목욕탕, 군인들이 진을 칠 수 있는 넓은 뜰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있다는 점에서 안토니아 요새는 하나의 도시와 같았고, 웅장한 모습은 궁전 같았다. 요새 전체의 모습은 각 모퉁이에 네 개의 망대가 있는 하나의 탑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 중에서 세 개는 높이 50큐빗이고 남동쪽에 있는 망대는 높이가 70큐빗이어서, 이곳에서 아래를 보면 전체 성전 구역을 볼 수 있었다. 성전의 주랑 두 개가 모이는 모퉁이에서 양쪽 주랑으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다. 요새에는 항상 로마 수비대가 주둔하였는데 축제 때에는 군인들이 무장을 하고 주랑들에 배치되어 백성을 감시하며 봉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였다. 만일 성전이 예루살렘 도성을 지키는 요새라면, 안토니아는 성전의 요새였으며 여기에 배치된 군대는 도성과 성전, 안토니아 요새, 이 셋 모두를 감시하였다. 예루살렘의 높은 지대는 헤로데 궁전이라는 요새를 가지고 있었다. 안토니아와 벳자타는 분리되었는데, 이것이 모든 언덕들 중에 가장 높았고 도시의 다른 한 쪽과 연결되었다. 그래서 이것은 북쪽에서 성전을 바라보는데 장애물이 되었다.”(『유다 전쟁사』 5권 238-247)
십자가의 길 제1처에서 서쪽으로 조금 더 가면 안토니아 요새의 남은 흔적인 엑체 호모 아치(Ecce Homo Arch)를 볼 수 있다. 이 아치의 명칭은 빌라도가 요한 19,5에서 한 말인 “자, 이 사람이오.”에서 유래한다. 길의 오른쪽에는 시온의 수녀회(Sisters of Zion) 수도원이 있다. 이 수도원 안에는 과거 스트루티온 못(Struthion Pool)이 있었고, 수녀원 지하에는 돌이 깔려진 도로와 리토스트로토스(요한 19,13)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이 포장된 길의 돌들에는 로마 군인들의 “임금 놀이(King Game)”의 흔적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게임은 주사위를 왕관 위에 놓는 이가 승리하는 방식이다. 로마 장군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안토니아 요새를 함락했던 당시의 상황을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로마군은 아르테미시우스 달 12일(=기원후 70년 5월 30일경)에 토목 공사를 시작했지만 그 달 29일(=6월 16일경), 즉 17일간의 계속된 작업으로 겨우 마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네 개의 둑은 그 규모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는 안토니아 요새에 있었는데, 제5군단이 스트루티온 못 가운데 세웠고, 또 다른 것은 제12군단이 약 20큐빗 정도 떨어진 곳에 세웠다.”(『유다 전쟁사』 5권 466-467)
② 제2처
십자가의 길 제1처인 우마리야 학교에서 길을 가로지르면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채찍 수도원(Franciscan Monastery of the Flagellation)이 있다. 이곳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을 묵상하는 십자가의 길 제2처이다. 이 수도원에는 프란치스코회 성서, 고고학 학교와 박물관이 있는데, 나자렛, 카파르나움, 주님 눈물 성당(Dominus Flevit) 등에서 발굴된 유물들, 동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수도원의 안뜰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 “예수 채찍 경당(Chapel of the Flagellation)”이다. 이 경당은 1929년 중세 때의 기초 위에 완전히 재건축되었다. 이 경당은 빌라도가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준 사건을 기억한다.(마르 15,15) 그래서 이 경당에는 채찍질 당하시는 예수님(마태 27,26), 손을 씻는 빌라도(마태 27,24), 바라빠 장면(마태 27,21)을 형상화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채찍 경당 맞은 편, 곧 수도원 안뜰의 다른 편 끝에는 “예수 사형 선고 경당(Chapel of the Condemnation)”이 있다. 20세기 초의 건물인 이 경당은 기원후 2세기 당시의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의 동쪽 광장에 있던 돌로 포장된 도로 위에 세워졌다. 이곳에서도 로마군인들의 “임금 놀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③ 제3처
제2처에서 나와, 다마스쿠스의 문(Damascus Gate)에서 오물의 문(Dung Gate)으로 통하는 길을 만나는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돌면 제3처가 있다. 이곳에서는 예수님이 첫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한다. 제3처에는 비잔틴과 십자군 시대의 옛 경당의 자리에 19세기 초에 다시 세워진 아르메니아 성당이 있다.
④ 제4처
제3처에서 약 15m 떨어진 곳에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가 만나는 모습의 부조가 있는 제4처가 있다. 여기에는 아르메니아의 작은 기도실이 있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4년 8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33) 십자가의 길 - 3
⑤ 제5처
십자가의 길 제4처에서 20m 가량 내려가다가 첫 번째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골고타를 향하는 오르막 길을 만나는데, 왼쪽에 제5처가 있다. 이곳에서는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진 것을 기억한다. “그들은 지나가는 어떤 사람에게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그는 키레네 사람 시몬으로서 알렉산드로스와 루포스의 아버지였는데, 시골에서 올라오는 길이었다.”(마르 15,21) 이곳에는 1895년에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경당이 세워졌다.
⑥ 제6처
제5처에서 약 50m 가량 가면 왼쪽에 베로니카가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림을 묵상하는 제6처가 있다. 이곳에는 1882년에 세워진 동방 가톨릭인 멜키트의 경당이 있다.
⑦ 제7처
제6처에서 오르막 길을 계속 가면 다마스쿠스의 문(Damascus Gate)으로 통하는 다른 길을 만나는데, 정면에 예수님이 두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하는 제7처가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작은 경당이 있는데, 내부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당시 건설된 도시의 로마 기둥이 있다.
⑧ 제8처
제7처에서 출발하여 첫 번째 오른쪽 길로 들어서서 약 30m 오르막 길을 가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부 인들을 위로하신 것을 기억하는 제8처를 만난다. “백성의 큰 무리도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가운데에는 예수님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보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아이를 배어 보지 못하고 젖을 먹여 보지 못한 여자는 행복하여라!’ 하고 말할 날이 올 것이다.’”(루카 23,27-29) 이곳에는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이 있다.
⑨ 제9처
제8처에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 가서 오른쪽 길로 들어선 후 계단을 오르면 콥트 교회의 수도원을 만나는데 그 출입문 기둥에 제9처가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서 예수님이 세 번째 넘어지신 것을 묵상한다.
⑩ 제10처
이상에서 살펴본 십자가의 길 제1처-제9처는 골고타를 향한 여정이고, 제10처-제14처는 “주님 무덤 성당(the Holy Sepulchre)” 안에 있다. 성당의 정문에 들어서서 오른쪽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그곳이 바로 골고타이다. 이곳에는 두 개의 경당이 있는데, 오른쪽에 있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경당이고 왼쪽의 경당은 그리스 정교회 소속이다. 이 두 경당의 모습과 여러 장식들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차이를 잘 드러낸다. 가톨릭교회 소속의 경당에는 십자가의 길 제10, 11처가 있고 그리스 정교회의 경당에는 제12처가 있다.
제10처는 예수님이 옷 벗김 당하신 것을 묵상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골고타라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이는 번역하면 ‘해골 터’라는 뜻이다. 그들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건넸지만 그분께서는 받지 않으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고 나서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는데 누가 무엇을 차지할지 제비를 뽑아 결정하였다.”(마르 15,22-24)
⑪ 제11처
제11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묵상한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때는 아침 아홉 시였다. 그분의 죄명 패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강도 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마르 15,25-27)
⑫ 제12처
제12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을 묵상한다.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 19,28-30)
⑬ 제13처
“주님 무덤 성당”의 골고타에서 계단으로 내려오면 예수님의 시신을 염하던 받침대 돌판이 있다. 이곳이 예수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을 묵상하는 제13처이다. “그 뒤에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다.”(요한 19,38-40) 마르 15,46-47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요셉은 아마포를 사 가지고 와서, 그분의 시신을 내려 아마포로 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시고, 무덤 입구에 돌을 굴려 막아 놓았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분을 어디에 모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⑭ 제14처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의 빈 무덤 앞에서 끝난다.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젊은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마르 16,1-6)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4년 9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주님 무덤 성당
예루살렘 구시가의 북서쪽에 있는 그리스도인 지역(Christian Quarter)에는 골고타와 예수님의 무덤이 위치했던 곳에 “주님 무덤 성당(Church of the Holy Sepulchre)”이 있다. 이 성당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한다. 그래서 주님 무덤 성당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가장 중요한 순례 장소이다.
■ 주님 무덤 성당의 역사현재의 주님 무덤 성당이 있는 곳은 기원후 1세기 초에 예루살렘 성벽 바깥에 위치한 사용하지 않는 채석장이었다. 예수님의 무덤에 대한 전승은 예루살렘 공동체에 의해 보전되었다. 최소한 66년까지는 이 무덤에서 초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전례가 거행되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135년에 아프로디테에게 봉헌된 신전을 세우기 위한 기초를 놓기 위해 이곳을 돌로 채웠다. 그래서 골고타 위에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의 광장과 신전이 세워졌다.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성녀는 324년에 예루살렘에 성지 순례를 왔는데, 그녀는 당시 예루살렘의 주교였던 마카리우스로부터 골고타와 무덤이 있었던 위치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성당을 세울 장소를 결정하기에 앞서 전통적인 위치를 면밀히 조사하였다. 황제는 전승이 전하는 예수님 무덤 자리에 있던 신전을 부수고, 326년에 성당 건축을 시작하였으며 335년에 봉헌하였다. 마침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길이 150m, 폭 75m의 대성당이 세워졌던 것이다. 성당은 네 요소를 포함하는데, 주요 도로와 통하는 계단이 있는 안뜰, 대성당(basilica), 골고타로 확인된 성당 안 남동쪽 구석의 바위, 그리고 무덤이다. 성당이 봉헌될 때 무덤이 절벽과 분리되지 않았는데, 이 둘을 잘라내는 엄청난 작업은 348년경에 완료되었다. 이 대성당은 614년에 페르시아군에 의해 소실되었다. 그 후 예루살렘 총대주교였던 모데스투스(Modestus)는 큰 수정 없이 재건축하였다. 638년에 칼리프 오마르(Caliph Omar)가 예루살렘을 그리스도인의 통제에서 이슬람의 통제로 이전하는 협정에 조인하러 왔을 때, 총대주교로부터 주님 무덤 성당에서 기도하도록 초대받았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초대를 거절하였다. “만일 내가 이 성당에서 기도한다면, 당신은 성당을 잃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슬람 신도들이 ‘오마르가 여기에서 기도하셨다.’라고 하며 이 성당을 점령하러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대함은 불행한 결과를 낳는다. 만일 이 시기에 성당이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다면, 1009년에 성당이 칼리프 알-하킴(Caliph al-Hakim)에 의해 파괴되지 않았을 것이다. 알-하킴은 성당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도록 명령하였다. 그 후 가난한 예루살렘 공동체는 보수할 형편이 못 되었다.1042년에 콘스탄티누스 9세 모노마쿠스(Constantinus IX Monomachus)가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되었는데, 성당의 재건축을 위해 제국의 기금을 제공하였다.(1042-1048년) 그러나 재건축을 위한 기금은 불충분하였다. 그래서 첫 대성당의 중요한 부분들이 방치되었다. 1099년 7월 15일에 십자군이 성당에서 테 데움(Te Deum)을 노래하였다. 그 후 십자군은 점차적으로 성당을 개조하고 보수하였다. 1149년 7월 15일에 로마네스크식 성당이 봉헌되었고, 1170년경에 종탑이 세워졌다. 이와 같이 오늘날 우리가 방문하는 주님 무덤 성당은 십자군에 의해 보수된 것이다. 이후에도 성당은 여러 차례의 파괴를 겪는다. 1808년에 화재가 있었고 1927년에는 지진이 있었다. 1959년에는 세 주요 교회인 가톨릭 교회,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성당의 보수 계획에 합의하였다. 그 후 1961년부터 필요한 보수 작업이 진행되었다.
■ 주님 무덤 성당의 내부 구조
현재 주님 무덤 성당은 가톨릭 교회,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콥트 교회, 에디오피아 교회의 공동 소유로 되어 있다. 이들 중에 특히 프란치스코 수도회로 대표되는 가톨릭 교회,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우선권을 가진다. 여섯 교회는 1852년에 체결된 “현상 유지법(Status quo)”에 의해 성당 안에서의 소유권과 전례, 전통들을 인정받는다. 한편 성당 정문의 열쇠를 보관하는 권한과 성당의 문을 열고 닫는 권한은 두 이슬람 가정이 가지고 있다.
성당 내부의 구조들 중에서 주님 무덤 경당, 예수 부활 경당, 그리고 예수님 시신을 염하던 받침대는 여섯 교회의 공동 소유이다. 가톨릭 교회의 소유는 골고타의 일부, 주님 무덤 경당의 입구, 마리아 막달레나 경당, 프란치스코 수도원과 성당 등이다. 그리스 정교회의 소유는 골고타의 일부, 아담 경당, 성당의 중앙 경당, 성당 입구에 위치한 경당과 수도원 등이다. 아르메니아 정교회는 헬레나 경당, 예수님의 시신을 염하던 모습을 세 명의 여인들이 지켜봤던 곳, 성 요한의 경당 등을 소유하고, 콥트 교회는 주님 무덤 경당 뒤편에 위치한 작은 경당을 소유한다. 그리고 시리아 정교회는 아리마태아 요셉의 가족 무덤 경당을 소유하고, 에티오피아 교회는 성당 입구 경당과 아리마태아 요셉의 무덤을 소유한다.
성당 정문 안뜰의 왼쪽에는 11세기의 세 경당이 있는데 그리스 정교회의 소유이다. 그 맞은편에는 콥트 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의 입구가 있다. 성당의 정문은 12세기의 것이고, 오른쪽에 있는 계단은 십자군 시대에 골고타로 연결되는 입구였는데 1187년에 폐쇄되었다. 성당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 계단을 통해 지상에서 5m 높이에 있는 골고타의 경당이 있다. 오른쪽에 있는 가톨릭 교회 경당의 창문을 통해 프랑크인들의 경당(Chapel of the Franks) 내부를 볼 수 있다. 골고타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의 경당에 위치한 십자가 아래쪽에는 아담의 경당(Chapel of Adam)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곳이 아담이 묻혔던 곳이라는 전승 때문에 생긴 것이다. 즉 유다인들의 전승에 따르면 아담의 무덤은 세계의 중심지이며 인류의 심장과 같은 예루살렘에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교 전승은 예수님의 십자가 바로 밑에 아담의 무덤이 있다는 것이다. 골고타에서 계단을 통해 내려오면 예수님의 시신을 염하던 받침대(Stone of Anointing)가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시신을 매장 전에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싼 것(요한 19,38-40)을 기념하는데 12세기에 처음으로 생겼다. 지금의 것은 1810년의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무덤 형태는 19세기의 것이다. 사실 1009년에 하킴에 의해 파괴된 돌로 된 무덤을 대체했던 11세기의 것은 1808년의 화재로 파손되었다. 현재의 모형은 윌킨슨(J. Wilkinson)에 의해 복원된 것이다. 그는 6세기 순례자들의 모형과 10세기 이전의 돌로 만든 모형을 바탕으로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보수되었던 무덤을 복원하였다.
한편 일부 영미 개신교도들은 현재의 주님 무덤 성당이 아닌 다른 곳으로 순례를 한다. 그들에 따르면 다마스쿠스의 문(Damascus Gate)에서 북쪽으로 약 150m 떨어진 곳에 있는 “정원 무덤(The Garden Tomb)”이 골고타와 예수님의 무덤이 위치했던 곳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19세기 말에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영국 고든 장군의 주장에 따른 것인데, 역사적 근거는 희박하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4년 10월호,&nbs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35)&엠마오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당하신 이후 제자들은 실망하여 갈릴래아로 떠나든지(요한 21장),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카 복음서는 클레오파스(Cleopas)와 다른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이 엠마오 이야기(루카 24,13-35)는 복음서에서 가장 아름다운 본문들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엠마오는 오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큰 관심의 대상이었고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아 부활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제 우리는 루카 복음서의 엠마오라는 마을에 대하여 역사적이고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려 한다.
■ 신약성경의 엠마오
루카 24,13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로 그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한 스타디온이 약 185m이므로, “예순 스타디온”은 약 11km가 된다. 그런데 이 구절의 다른 필사본에 의하면 “백육십 스타디온”, 즉 약 29.6km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이 엠마오가 정확하게 어느 장소를 가리키는지에 대한 매우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었고, 논란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 엠마오로 추정되는 곳
현재까지 엠마로오 추정되는 곳은 예루살렘 주변의 다양한 장소들인데, 대표적으로 암바스, 엘 쿠베이베, 아부 고쉬, 칼로니에 등이 있다.
① 암바스
루카 복음서의 엠마오를 위한 첫 번째 추정지는 암바스(Amwas)이다. 암바스를 엠마오로 추정하는 이유는 그 이름 때문이다. 왜냐하면 암바스는 엠마오의 아랍식 발음이기 때문이다. 고대 문헌 중에는 예로니모와 에우세비오 등의 기록이 이 암바스를 엠마오로 간주하였다. 암바스는 예루살렘에서 31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예루살렘에서 텔 아비브(Tel Aviv)로 가는 길 가에 있다. 그런데 암바스는 현재 폐허의 상태이고, 오늘날의 행정 지도로는 라트룬(Latrun) 근처이다. 20세기 초에 예루살렘 성서·고고학 연구소의 학자들에 의해 암바스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헬레니즘 시대, 로마 시대, 비잔틴 시대의 폐허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사마리아 인의 회당도 발견되었다. 십자군 시대의 성당 아래에 비잔틴 시대의 성당이 있는데, 그 아래에는 전통적으로 클레오파스의 집으로 여긴 고대 가옥이 있다. 로마 시대의 목욕탕은 인상적인데, 그것은 클레오파스 시대 보다 더 후대인 기원후 3세기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 암바스는 작은 시골 마을이라기보다는 규모가 큰 도시였다. 요세푸스의 『유다 고대사』 14권 275에 따르면, 기원전 1세기 말경에 엠마오(Emmaus)는 카시우스(Cassius)에 의해 고프나(Gophna), 릿다(Lydda), 탐나(Thamna)와 함께 도시 전체가 노예 상태로 전락했다. 그 후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황제는 암바스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221년에 로마 황제 엘라가발루스(Elagabalus)는 마을을 폴리스(polis)로 승격시켰고, 그리스어로 “승리의 도시”라는 의미인 니코폴리스(Nicopolis)로 개명하였다. 이 이름은 유명한 마다바 지도(Madaba map)에 나온다. 그런데 암바스를 엠마오와 동일시하는데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예루살렘과의 거리이다. 비록 예루살렘과 엠마오 사이의 거리를 “백육십 스타디온”으로 표기하는 일부 사본이 있지만, 31km 떨어진 암바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클레오파스와 동료가 밤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다. 그들은 하루 동안 거의 60km를 걷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현재의 암바스가 엠마오일 가능성을 낮게 평가한다.
② 엘 쿠베이베
엘 쿠베이베(El-Qubeibe)고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11km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이다. 십자군 시대 말기부터 순례자들이 엘 쿠베이베를 찾기 시작하였고 이곳을 엠마오로 여겼다. 예루살렘과의 거리는 루카 복음서가 말하는 “예순 스타디온”에 부합한다. 사실 15세기 이전에 엘 쿠베이베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1500년대에는 로마 시대의 시골 길과 마을의 흔적이 발견되고, 비잔틴 시대의 성당이 발굴되어 많은 순례자들이 엘 쿠베이베에 왔다. 프란치스코 수도자들은 1867년에 이곳에 정착하였다. 기념 성당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의해 20세기 초에 건립되었다. 이 성당은 클레오파스의 집이라고 여겨졌던 곳에 세워진 성당의 폐허 위에 건축되었다. 이 기념 성당은 1901년 10월 12일에 밀라노 대교구의 안드레아 페라리(Andrea Ferrari) 추기경에 의해 축성되었다. 오늘날에도 매년 부활절 첫 월요일과 클레오파스 성인 축일(9월 25일)에 장엄 미사가 봉헌된다. 그러나 엘 쿠베이베는 역사적으로 엠마오라는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다. 그리고 이곳에 클레오파스의 집이 있었다는 그 어떤 증거도 없는 상황이다.③ 아부 고쉬
또 다른 엠마오의 추정지는 아부 고쉬(Abu Ghosh)이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15km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이다. 구약 성경에는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 사이의 경계인 “키르얏 여아림”으로 불린다. 이곳은 계약 궤가 20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1사무 6,21-7,2; 2사무 6장) 전통적으로 이 마을은 카리엣 엘 에나브(Qaryet el-Enab)로 불렸는데, 이 이름은 키리앗 에아림(Qiryat Yearim)의 아랍식 명칭이다. 사실 아부 고쉬는 19세기 초 이 마을 근처에 야영지를 차렸던 아랍 산적 두목의 이름이다. 십자군 시대에 아부 고쉬를 엠마오로 여겼다. 그 이유는 이곳에서 발견된 대상숙소(caravanserai) 때문이다. 이것은 여행자들이 쉬는 곳이었는데, 중세기의 순례자들은 이곳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두 제자와 빵을 함께 나눈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1140년에 기념 성당이 세워졌다. 오늘날 이곳에는 베네딕도 수도원이 있다.
④ 칼로니에
칼로니에는 구약 성경에서 “모차”(여호 18,26)로 언급된 곳으로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6km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이다. 로마의 티투스 장군은 유다인들의 무장 봉기를 진압한 후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 마을은 라틴어로 아마사라고 불렸기 때문에, 복음서의 엠마오로 여겨졌다. 그러나 사실 이곳은 순례자들보다는 고고학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곳이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4년 11월호,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예수 승천 경당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들을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려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사도 2,32-33)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경당이 예루살렘의 올리브 산 위에 있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승천을 전하는 본문들을 다시 읽고, 예수 승천 경당의 역사를 살펴보려 한다.■ 신약성경의 예수님 승천
성경 시대의 사람들은 삼층 구조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맨 위의 하늘과 그 아래의 땅, 맨 아래의 셔올로 이루어진 이 세계관은 전체 성경 이야기의 배경을 이룬다. 하늘은 하느님의 세계이고 땅은 인간의 세계이며 셔올은 죽은 이들의 세계이다. 이러한 배경 안에서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들이 서술된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을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것으로 표현되고, 그분이 돌아가신 것은 셔올로 내려가신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이들 중에서 일으켜지신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 안에 들어가신 것은 승천, 즉 하늘로 올라가신 것으로 표현된다. 이와 같이 복음서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들을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에 입각하여 하강과 상승, 즉 내려오심과 올라가심으로 표현한다.
마르 16,19에 따르면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특히 예수님의 승천은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상세하게 묘사된다. 이 두 책의 저자에게 있어 예루살렘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예루살렘은 구원의 역사의 중심이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곳, 성령 강림이 일어난 곳, 복음 전파가 시작되고 교회 공동체가 시작된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루카 24,50-53) 여기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은 베타니아 근처로 언급된다.
사도행전은 승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도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 물었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동안 그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 뒤에 사도들은 올리브 산이라고 하는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 산은 안식일에도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었다.”(사도 1,6-12) 여기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은 올리브 산으로 언급된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 즉 걸음걸이로 2,000보의 거리였다. 이 본문에서는 역사적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연속성이 강조된다. 곧 제자들의 사명은 예수님의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머리말은 예수님의 승천이 부활하신 뒤 40일 이후에 일어난 사건으로 소개한다. “테오필로스 님, 첫 번째 책에서 저는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처음부터 다 다루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뽑으신 사도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분부를 내리시고 나서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다 다루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수난을 받으신 뒤, 당신이 살아 계신 분이심을 여러 가지 증거로 사도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사도 1,1-3)
■ 올리브 산의 중요 순례 장소예루살렘의 동쪽에 위치한 올리브 산에는 겟세마니 대성당, 겟세마니 동굴 성당, 마리아 무덤 성당, 주님 눈물 성당(Dominus Flevit), 주님의 기도 성당(Pater Noster), 그리고 예수 승천 경당 등이 있다. 겟세마니 대성당에서 북서쪽으로 200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마리아 무덤 성당은 1757년 이후 그리스 정교회와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관리하고 있다. 주님 눈물 성당(Dominus Flevit)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면서 눈물을 흘리신 사건(루카 19,41-44)을 기념한다. 이 성당은 1955년에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의해 세워졌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 성당(Pater Noster)의 회랑 벽에는 타일 판에 세계 각국의 언어로 주님의 기도(마태 6,9-13; 루카 11,2-4)가 새겨져 있다. 이 성당에 우리말로 된 주님의 기도는 가톨릭용과 개신교용이 있다. 이 성당과 그곳의 가르멜 수녀원은 1875년에 완공되었다. 주님의 기도 성당에서 왼쪽 길로 북쪽으로 가면 예수 승천 경당이 있다.■ 예수 승천 경당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전에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은 올리브 산의 한 동굴에서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고 거행하였다. 왜냐하면 당시의 그리스도인에게는 감추어진 장소가 더 안전했기 때문이다. 384년에 에제리아(Egeria)는 이 동굴 근처 언덕에서 열린 예수님 승천의 전례 거행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 첫 번째 성당이 세워진 것은 392년에 로마 황제의 가족 중 한 사람인 포이메니아(Poimenia)에 의해서였다. 당시 성당의 천장은 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다. 그 후 성당은 여러 차례 파괴되고 재건되었다. 십자군 시대에 세워진 성당은 그 이전의 원형 모양을 팔각형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성당 근처에 수도원도 세웠다. 중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성당 바닥에 있는 오른쪽 발의 흔적을 예수님의 것으로 여겼다. 오늘날에도 이 발자국이 남아 있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역사적 신빙성이 매우 희박하다.
예수 승천 경당은 1198년에 살라딘(Saladin)에 의해 점령되고 이슬람인들의 손에 넘어 갔다. 그들에 의해 1200년에 경당이 복원되었을 때 십자군 시대 성당의 중요 부분이 보존되었으나 천장에 둥근 돔 모양의 지붕이 만들어졌다. 결국 예수 승천 경당은 이슬람의 사원(Mosque of the Ascension)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비록 예수님의 승천이 코란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이슬람인들은 그것을 믿고 있다. 오늘날 이슬람인의 소유인 예수 승천 경당에서는 1년에 하루, 즉 주님 승천 대축일에 그리스도인들이 미사 전례를 거행하도록 허락된다. 이곳에서 마태오 복음서의 마지막 구절을 기억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하였고,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빛, 2014년 12월호, 송창현 미카엘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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