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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여행] <6>“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윤 베드로 2018. 12. 6. 11:42

하느님의 약속과 이스라엘의 믿음


 

▲ 렘브란트, ‘아브라함의 제사’, 1635, 캔버스 유화, 에르미타주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약속을 주십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떠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창세 11,27-32에는 테라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족보는 가득 채워진 모습이 아닌 텅 빈 모습을 보여 줍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이는 임신하지 못하는 몸이어서 자식이 없었다고 되어 있고(창세 11,30), 아브라함의 아버지 테라는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칼데아의 우르를 떠났지만 하란에서 자리를 잡고 살다가 거기서 죽었다고 되어 있습니다(창세 11,31). 목적지에 도달하지도 못했고, 땅도 없고 후손도 없는 처지입니다.

 

빈손인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 지금 머물러 있는 곳을 떠나라고,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창세 12,1-2).

 

사라이가 임신하지 못하는 몸일 바에야, 무슨 희망을 가지고 땅을 찾아 떠납니까?

 

그런데 하느님은 후손을 먼저 주시고 그 후손에게 땅이 필요하니 다른 땅을 찾아가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머물러 있던 곳을 떠나면 그곳에서 많은 후손을 얻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그 이후의 역사가 펼쳐지지 않습니다. 창세 12-50장에서 계속되는 성조사의 핵심은 그 약속이고, 약속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곧 길을 떠나 가나안까지 갔지만 약속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가장 큰 위기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렵게 얻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실 때에 벌어집니다(창세 22장).

 

약속이 성취되려면 이사악이 있어야 합니다.

 

 이사악이 태어나기 전에 아브라함은 하가르의 아들 이스마엘이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를 바랐었고 그에게라도 희망을 걸려고 했지만 굳이 하느님께서 사라에게서 태어난 아들에게서 그의 후손들이 이어지리라고 다짐하셨었습니다(창세 17장).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아들을 제물로 바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외아들을 바치는 것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더 큰 문제는 이사악에게 약속이 걸려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모순되는 상황입니다. 이사악을 죽이면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사악을 죽이라고 하신다면 당신 스스로 약속을 위험에 처하게 하시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로마 4,21).

 

약속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분을 믿습니다. 후손의 약속은 꼭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이사악을 꼭 살려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믿는 것은 하느님입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면, 아무리 약속을 위협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따릅니다. 어떤 길을 통해서든 하느님께서 약속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야훼 이레’, 주님께서 마련하신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곳을 떠나 가나안으로 왔듯이, 야곱도 집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오랜 기간을 머무르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요셉도 이집트에서 살고 있습니다.

 

 대대로 반복되어 온 떠돌이 삶, 그것이 이스라엘 조상들의 역사였고 또한 이스라엘의 역사였습니다.

 

그 떠돌이 삶 속에서 성조들은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이집트로 팔려갑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신임을 얻기도 하지만 큰 어려움들도 겪습니다.

 

 나중에는 가나안에 기근이 들었을 때에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내려온 형들을 만나게 되고, 이스라엘 집안이 이집트에 자리 잡고 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창세 37-50장).

 

그런데 그 마지막에 이르러,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요셉이 보복할 것을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창세 50,19-20).

 

인간들의 손으로 엮어진 사건들 안에서 요셉은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습니다. 자신이 이집트에 내려오게 된 것도, 지금 이스라엘 집안이 같이 내려오게 된 것도 이 백성을 살리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었음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요셉은 이집트 땅에서 이 세상을 떠나면서도,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스라엘 집안을 찾아오시어 그들을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이라고 믿으며 그때에 자신의 유골을 가지고 올라가라고 말합니다.

 

이 유언은 성경의 중요한 단락들에서 기억됩니다. 탈출 13,19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는 순간 모세는 그 유언을 기억하며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리고 여호 24,32에서는 영토 정복과 영토 분배가 모두 끝나고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난 것을 전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요셉의 유골을 스켐에 묻었다는 것을 언급합니다.

 

요셉 이야기는 거기서 비로소 끝나게 됩니다. 빈손으로 약속을 붙잡고 살았던 이들, 그들이 성조들이었고 이스라엘은 이러한 성조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자신의 기원과 신앙의 기원을 설명했습니다.

 

조상들의 믿음에 대해 말하는 히브리서 11장을 꼭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히브 11,13.16).

 

 

 

 

출처 : 평화와 착함
글쓴이 : 착한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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