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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안소근 수녀와 떠나는 구약 여행] (41)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2역대 36,23)

윤 베드로 2019. 1. 9. 21:19

귀향했으나 예전의 유다가 아니었기에…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2역대 36,23).

한 시대를 시작하기 위하여 오늘은 또 역사 공부를 해야 하겠습니다. 위에 인용한 것은 역대기의 마지막 부분과 에즈라기의 첫 부분에 실려 있는 키루스 칙령의 내용입니다.


에제키엘은 언젠가 예루살렘이 회복되리라고 예고했고, 제2이사야는 해방이 가까웠음을 선포했습니다. 이제 그 날이 왔습니다.

 

기원전 539년에 바빌론을 무너뜨린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가, 바빌론에 유배가 있던 유다인들에게 귀향을 허락한 것입니다.

 

 바빌론에 비해서 페르시아는 정복 민족들에게 관용적이었다고 했지요.

 

무력으로 그들을 내리누르는 것보다, 적당히 풀어주면서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이 더 쉽고 비용도 적게 들었다고 합니다. 제국의 넓이를 생각하면 그럴 법도 했겠습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키루스가 역대기나 에즈라기에 나온 그대로의 칙령을 반포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로 말하면 키루스에게 유다는 너무 작은 땅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민족들의 종교 자유를 제한하는 바빌론의 금령들을 폐지했고 바빌론이 여러 나라의 신전에서 빼앗아 온 신상과 기물들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신전을 다시 지음으로써 재건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유다인들도 고향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과 도성을 재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즈라기 6장 3-5절에서는 페르시아 왕실에서 성전 건축 비용을 대어 주도록 했다고까지 말합니다.

귀향이 반갑지만은 않아

하지만, 돌아가라고 한다고 모두 신이 나서 즉시 바빌론을 떠나온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상상했다면 바빌론 유배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배 간 이들은 바빌론의 한 지역에 모여 살면서 정착을 했고, 유다의 상황이 오히려 어려웠습니다.

 

서울 시내에서도, 수십 년간 장사를 한 가게가 재개발로 철거될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떠나가기 어려워합니다. 머나먼 바빌론에서 50년간 땅을 가꾸고 일을 해왔다면 어떻겠습니까?

페르시아 왕실은 세스바차르에게 예루살렘 성전 기물들을 되돌려줄 임무를 맡겼습니다(에즈 5,15 참조). 세스바차르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와 함께 귀향한 이들의 수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고, 이들은 예루살렘의 재건을 크게 진척시키지도 못했습니다.

 

도성이 워낙 많이 파괴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과 유배를 가지 않고 유다 땅에 남아있던 이들 사이에 적지 않은 충돌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땅입니다. 지배 계층과 기술자들이 유배를 간 다음, 바빌론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땅을 유배를 가지 않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던 이들이 바빌론 정복자들로부터 땅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그들은 바빌론에 절대 충성하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50년이 지나 본래 땅 주인이 돌아옵니다. 더 늦게 돌아온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땅은 누구의 것이 되어야 할까요?

 

좀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유배 전의 땅 주인은 더 이상 그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됩니다.

 

 이 문제는, 유배가 끝난 다음 정복 세력이 아니라 유다인들 자체 안에서 있었던 분열과 갈등의 상황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성전 재건축하고 도성 성벽도 재건

이후의 역사는 더 간단히 요약하고 다음 주부터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기원전 520년에는 다윗 왕조의 후손인 즈루빠벨과 사제 예수아의 지도로 또 한 집단이 귀환합니다.

 

기원전 520~518년에는 예언자 하까이와 즈카르야가 성전 재건을 독려하였고, 기원전 515년에는 소위 제2성전이라고 하는 재건된 성전의 봉헌이 있었습니다.

 

이 성전은 솔로몬 성전처럼 화려하지는 못했지만, 귀향 후 공동체의 중심이 됩니다.

기원전 5~4세기의 상황에 대해서는,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활동 외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페르시아의 고위 관리가 되어 있었던 느헤미야는 기원전 445년에 예루살렘에 돌아와 도시의 성벽을 재건합니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이 일을 완수했고, 그 후 약 십여 년 동안 예루살렘에 머뭅니다. 그 후 얼마 동안 페르시아에 갔다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사제이며 율법학자였던 에즈라는 주로 종교적인 영역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때가 언제인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에즈라기 7장 7절에서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임금 제칠년”이라고 말하는데, 그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라면 그 해는 기원전 458년일 것이고(느헤미야가 활동하기 전)

 

그렇지 않고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라면 기원전 398년이 됩니다(느헤미야가 활동한 다음).

 

 성경에서는 에즈라가 느헤미야보다 먼저 왔다고 말하는데, 묘사된 상황을 보면 아무래도 느헤미야가 먼저 온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이든, 에즈라가 한 일은 종교적인 개혁으로서 “하느님의 법”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활동이 있었던 다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등장하기까지 유다에는 큰 변동이 없었습니다.


<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대전가톨릭대 교수>

출처 : 평화와 착함
글쓴이 : 착한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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