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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묵주부적’

윤 베드로 2015. 7. 12. 18:32

‘묵주부적’

 

글 / 양희창 세례자 요한  신부. 대전교구 대화동성당 주임

 

성물방에 가보면 눈이 휘둥그레지는 묵주들이 참 많습니다. 재질도 그렇지만 모양과 빛깔이 하나쯤 지니고 싶게 만듭니다.
그러고 보면 시대에 따라 묵주의 변천사도 다양하게 흘러온 것 같습니다.
초세기부터 작은 돌멩이나 곡식 낱알, 구슬이나 나무알 등을 사용해서 매일 정성스럽게 바쳤습니다.

묵주기도가 복음과 구원역사를 꿰뚫도록 이끌어주는 기도방법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입니다.
더욱 ‘장미’를 뜻하는 ‘로사리오(Rosario)’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성모님께 봉헌하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임에 틀림없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말씀처럼, ‘가장 감동적인 사랑의 표현’이며,

우리가 바치는 묵주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매일 체험하게 해주는 방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온 정성을 다해 묵주 기도를 바치면 주님과 성모님께서 평화와 화해를’ 주신다고 했으니,

매일의 기도를 통해 복음을 묵상하고 구원의 신비에 빠져드는 일은 우리의 기본이 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묵주기도를 바치는 분들을 성당에서 뿐만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만나게 됩니다.

아침 출근길과 버스 안에서, 산책을 하면서도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고 기도하는 신심어린 모습을 보면서

저절로 기도에 동참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묵주반지나 묵주를 손에 감고 있는 것을 보면 왜그리 반가운지

기도하는 분의 지향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하게 됩니다.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묵주를 한두 개는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요즘은 더욱 다양한 묵주가 나와서 눈을 빼앗기게 만드는데,

유행처럼 이런 저런 것들이 흐름을 타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부터가 한동안 선호하는 묵주가 있다가도 금세 시들해지면 다른 걸 찾는 걸보면,

기도보다 묵주에 더 관심이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묵주 재료가 참 다양합니다.

나무묵주는 기본이고 유리구슬, 매듭, 야광, 못난이진주, 아크릴, 크리스탈, 주석, 벼락 맞은 대추나무나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묵주 등등 끊임없이 새로운 묵주들이 나타납니다.

어쩌면 손쉽게 구입할 수도 있고, 이것저것 사서 써보기도 하면서 다른 이에게 나눠주는 걸 보면서

다양한 재료의 묵주가 기도하고 싶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묵주가 액세서리, 부적처럼 여겨지는 것 우려돼

 

분명한건 오래전 신앙선조들은 투박한 묵주 하나에도 목숨을 걸었고 귀하디귀한 것이었기에

그것 하나 얻으려고 무던히 애썼던 역사와는 사뭇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간혹 무명 순교자의 무덤에서 발견된 낡은 묵주라도 보게 되면 그 신앙을 되새김질하게 되는데,

훗날 우리의 자손들이 우리가 사용한 묵주를 바라보면서 같은 마음이기를 바래봅니다.

한 번은 지인이 정성껏 만들어준 매듭묵주를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지인의 정성을 생각하며 기도하던 것이라 얼마나 안타깝고 낙심하게 되던지 제대로 기도하지 못한 것보다 묵주를 잃어버린 것에

더 마음 상하고 있는 자신을 볼 때 본질을 잃어버린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좋은 묵주를 보면 욕심이 생기는 걸 보면, 어쩔 수 없는 나약함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물론 다양한 묵주를 준비해서 언제든지 손에 닿기만 하면 기도할 수 있도록 해놓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예쁜 묵주를 선물하고 싶은 마음도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다양하게 만들어지는 묵주가 아름다움을 위한 액세서리가 되거나 지니고 다니면 도움이 된다는 듯 부적처럼 여기지는

기복신앙이 우려되기도 합니다.

분명 묵주기도를 바치는 신자는 그 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고 그 놀라운 구원 신비에 마음을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눈을 빼앗긴다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이사 42,20)가 되고 말 것입니다.

 

묵주를 잡은 손으로 성모님의 사랑 느껴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한국교회가 “윤리적,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끊임없는 사명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고, 영적인 회개를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일은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그 중에서도 묵주기도는 가장 단순하고도 직접적인 방법이 될 것입니다.

묵주는 악세사리나 부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로 이끌어주는 지복직관(至福直觀)의 길입니다.

마치 엄마의 손을 잡고 있으면 두려움이 사라지는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묵주를 잡고 있는 손으로 성모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묵주가 부적이 되느냐 엄마의 손을 잡은 아이의 마음이 되느냐는 우리의 자세에 달려있습니다.

비록 기도하지 못해도 묵주를 가까이 두겠다는 마음도 훌륭하지만 조금 더 분명하게 묵주기도의 의미를 되새겨야 합니다.

20세기의 신학자이며 가톨릭 사제인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는

가톨릭 안에 묵주기도가 중요한 까닭이  ‘그리스도를 지향한 마리아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정의합니다.

이처럼 묵주는 성모님과 함께 각 신비들을 묵상함으로써 예수님을 만나도록 해주는 방법입니다.

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며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치는 매일의 기도가 우리를 구원의 신비로 이끌지 못한다면 우리의 눈과 귀는 닫혀 있는 것이 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이 백성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 백성을 불러 모아라.’(이사 43,8)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눈과 귀가 예수님께로 향할 수 있도록 묵주를 가까이 하되,

패션 아이템이나 불안을 해소하는 신물(神物)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저에게 누군가 어떤 묵주가 가장 좋으냐고 묻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묵주는 자기 손때가 묻고 패여 기도의 시간이 새겨진 묵주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 가까이 머무르려는 노력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조용히 묵주 알을 매만지며 영적 꽃다발을 바치는 이들과 더불어 손에 익은 묵주로 구원의 신비를 묵상합니다.

그 묵주는 성모님의 손을 붙들 듯 마주잡은 것이고,

시선을 사로잡기보다 마음을 사로잡아 예수님께로 이끌어 주는 묵주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 레지오단원들의 쉼터
글쓴이 : ♥보니파시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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